이 칼럼의 편집자이자 뛰어난 서평가이기도 한 (친애하는) <씨네21>의 이다혜 기자는, 나와 함께 책 관련 팟캐스트에 출연한 자리에서 “어째서 김중혁 작가님은 책의 작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매번 팔짱을 끼는 건가요?”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 얘기를 듣는 중에도 나는 팔짱을 끼고 있었으므로 이다혜씨의 눈을 보는 순간 뜨끔했다. 내가 그랬나? 그랬구나. 그동안 찍었던 사진들이 일렬로 눈앞을 스쳐갔다. 사진 속의 나는 대체로 팔짱을 끼고 있거나, 팔짱을 낀 채로 한손을 들어올렸거나 (말하자면 제임스 본드 스타일이랄까) 막 팔짱을 끼려던 찰나에 카메라에 찍혔거나, 팔짱을 못 끼게 하니 팔꿈치라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그토록 팔짱이 편했던 것일까, 이다혜씨 눈치를 보며 슬며시 팔짱을 풀고 대답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이다혜씨가 대규모 2차 질문 공습을 감행해왔다. “여자들은 가슴을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남자 앞에서 팔짱을 끼는데, 김중혁씨는 무엇을 위해 팔짱을 끼고 있는 겁니까?” 아,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일까.
카메라 앞에 서기만 하면 나는 도무지 팔을 가눌 수가 없다. 두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는 것도 이상하고, 무한도전 자세를 취할 수도 없고, 한손으로 브이자를 그리고 있자니 영 작가답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어영부영하고 있으면 사진작가 선생님은 그따위 자세를 취할 거면 촬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다보면 어느새 촬영은 끝나 있다. 신기하게도 촬영이 끝날 때쯤이면 자세를 잡는 것에 조금 익숙해진다. 이젠 정말 좋은 자세를 취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촬영은 끝났다. 촬영 장비를 챙기고 떠나려는 사진작가 선생님을 붙잡는 용기가, 내게는 없다. 용기를 내어 붙잡았는데도 결과물이 신통치 않으면 용기는 만용이 되니까, 나는 사진작가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먼발치에서 손을 흔드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기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 다음 책 낼 때는 작가 사진을 싣지 말아야지.’ 뭐 이런 다짐을 하면서.
몸의 단서를 좇는 책 <FBI 행동의 심리학>에서는 팔짱을 두 종류로 나눈다. 단순하게 교차된 팔은 편안함을 느끼기 위한 자세다. 강연을 듣기 위해 앉은 청중이 팔짱을 끼는 것은 그 자세가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흥, 그래 무슨 얘기 하나 들어나보자’라는 공격적인 몸의 언어가 아니라 ‘자, 이제 나는 들을 준비가 다 되었다’라는 중립적인 언어인 것이다. 하지만 팔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팔을 교차시키고 손으로 꽉 잡는 행동은 불편함을 드러내는 몸의 언어다. 앉아서 쿠션을 끌어안는 것 역시 불편함의 팔짱과 비슷한 몸의 언어다. 팔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있다.
인간은 흥분하면 팔의 움직임이 거칠어진다. 중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축 처진 팔을 어떻게든 위로 들어올리고 흔들고 싶은 에너지가 생긴다. 하루를 힘들게 마친 회사원들의 팔은 아래로 축 처져 있지만 승리를 거둔 사람들의 팔은 위로 뻗어 있다. 팔을 위로 뻗는다는 것은 중력에 대항할 만큼 힘이 넘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화를 내거나 반항을 할 때 몸 위로 두팔을 교차시킨다. 혹은 두팔로 몸을 감싼다.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을 때, 나를 한명의 존재로 인식해 달라고 항의하고 싶을 때 팔짱을 낀다. 영화 <마이 걸>의 포스터에서 매컬리 컬킨은 두손을 가지런히 앞에 두고 있는 반면, 안나 클럼스키는 팔짱을 낀 채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다. 두 아이의 성격을 보여주는 몸동작이다. 어른이 되면서 팔짱의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팔짱을 낀 어른의 모습은 좀더 방어적으로 보이고 내성적으로 보인다.
(친애하고 존경하는) 이다혜 기자의 말에 따르면 연극배우 출신의 연기자들은 사진 찍는 것을 어색하게 여긴다고 한다. 다른 연기자들과 함께 서 있는 무대에 익숙하다보니 ‘단독 촬영’에 약한 것이다. 반면에 모델 출신의 연기자들은 사진 찍는 걸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다. 팔짱을 낀 자세로 영화 포스터를 찍은 ‘내성적인 배우’가 있을까?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최고의 영화 잡지 <씨네21>의 기고자다운 품위를 지키기 위해, 난시라는 신체적 결함과 최근 들어 전같지 않게 ‘노안이 의심될 만큼’ 침침해진 시력의 한계를 딛고 1만여건에 달하는 영화 포스터를 면밀히 검토했다. 포스터가 영화를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포스터와 영화의 상관관계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난 일이다. 예를 들어 이창동 감독의 영화 포스터에는 ‘감정의 극단을 통과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많이 등장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포스터에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모습이 유독 자주 보인다. 포스터는 가끔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거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의 얼굴만 등장하는 포스터의 영화들은 (내 경우엔) 대체로 재미가 없고, 눈만 커다랗게 부각된 공포영화들은 (역시 내 경우엔)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다.
1천건이 넘는 영화 포스터 중에는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꽤 많았다. <반창꼬> 포스터에는 “가슴이 커 보이려고 팔짱을 끼는 건가요?”라는 이다혜씨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고 싶은 고수씨의 팔짱이 등장하고, <색,계>의 중국어권 포스터에서 양조위도 팔짱을 끼고 있다. ‘007 시리즈’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 역시 팔짱을 끼고 있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인지 사격자세의 예비동작인지 모호하다. 일단 나는 팔짱으로 간주했다. 007 영화의 포스터 속에는 제임스 본드와 함께 본드걸이 늘 벗은 몸으로 서 있는데,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의 팔짱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절대 포스터 속의 본드걸에게 먼저 치근덕거리지 않아요. 제 두손을 좀 보세요.’ 최근의 007 시리즈 포스터에서는 이런 ‘신사 정신’이 사라진 것 같아 개인적으로 좀 아쉽기도 하다.
팔짱 포스터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휴 잭맨 주연의 <리얼 스틸>이었다. <울버린>에서의 야수적인 팔 동작과 달리 <리얼 스틸>의 휴 잭맨은 팔짱을 끼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팔짱을 끼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자세는 <리얼 스틸>의 영화 내용과도 맥이 닿아 있다. 한때 권투를 했지만 지금은 로봇 복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휴 잭맨의 삶을 포스터로 승화시키며 ‘강 건너 로봇 구경’ 아니 ‘링 건너 로봇 조종’의 삶을 팔짱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질문의 답을 완성해보자. 나는 왜 작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팔짱을 끼는가. 의미 부여를 과도하게 한다면, <리얼 스틸> 포스터의 휴 잭맨의 팔짱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은 내 소설이고, 이 세계는 내가 만든 세계이지만, 소설 속의 이야기에 나는 책임이 없다. 나한테 문의하지 말아 달라. 나는 여기서 손 뗐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팔짱을 끼고 있을 것이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알아서들 읽으시길 바란다. 대략 이런 메시지가 아닐까. 의미 부여가 좀 심했나. 이게 다 (친애하는) 이다혜 기자 때문에 생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