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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뢰하] <스톤>

김뢰하

“요즘 들어 특히 더 팔자주름이 깊어지고 있다. 취미로 나팔을 배우고 있는데, (입술을 가늘게 만들어 양옆으로 벌리며) 이렇게 해야 소리가 난다. 그러니 더 파일 수밖에. 고민이다. 때려치울까 말까. 너무 주름이 진해져서. (웃음) 나팔은, ‘이제 와서 이런 걸 배워 뭐하지’ 하는 생각을 좀 이겨보려고 배우고 있다. 소리도 좋고.”

김뢰하의 얼굴엔 팔자주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오래된 강의 물줄기처럼 두뺨에 가지런히 얹힌 팔자주름은 김뢰하의 얼굴을 세찬 남성의 얼굴로 만들었다. 어느 인터뷰에선 굵게 팬 주름이 “태생적인 것”이라고도 했지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 주름의 3할 정도는 스스로가 만들어간 것일 테다. 거기에 바둑돌처럼 단단한 두눈. 두눈에 슬쩍만 힘을 줘도 상대로 하여금 방어 태세를 취하게 만드는 그 눈빛도 김뢰하를 강한 남성으로 각인시키는 데 일조했다. 건달, 깡패, 조폭, 혹은 형사. <살인의 추억>의 조용구 형사, <달콤한 인생>의 조직의 2인자 문 실장 캐릭터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일까. 김뢰하는 폭력이 일상인 남자들을 지금까지 줄곧 연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의 눈빛과 주름도 점점 깊어져갔다.

첫 주연을 맡은 장편영화 <스톤>에서도 김뢰하는 폭력의 세계에 몸담고 있는 남자를 연기한다. 그런데 김뢰하가 연기하는 은퇴를 앞둔 조직의 두목 남해는 뭔가 다르다. 먼저 <스톤>에서 김뢰하는 전에 없이 중후한 멋을 풍긴다. 그가 이렇게 멋진 외모와 목소리를 지닌 중년의 배우였던가 싶을 만큼. 그리고 그의 두눈은 상대를 찍어 누를 듯한 기운을 뿜어내지도 않는다. 대신 회한 가득한 눈빛, 망설임 가득한 눈빛을 내비친다. 그 모습이 낯설고 또 신선하다. 전작인 <몬스터>에서, 제가 살기 위해 동생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치던 남자 익상과는 그 간극이 상당하다. “전에 조폭도 해봤고, 중간보스도 해봤고, 강한 캐릭터를 많이 했다. <스톤> 시나리오를 봤을 때도 처음엔 ‘또 조폭 캐릭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찬찬히 뜯어보니까 단순히 조폭 얘기가 아니더라. 여태 해온 캐릭터와는 결이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때 영화와 캐릭터에 호감이 생겼다.”

남해는 “인생이 바둑이라면 첫수부터 다시 두고 싶어 하는 남자”다. 프로 바둑기사로 데뷔하지 못한 채 내기바둑이나 두면서 인생을 허비하는 청년 박민수(조동인)를 만나면서 남해는 후회스런 제 삶을 돌아보게 된다. 바둑을 통해 인생 공부도 한다.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극단 선후배 동료들하고 자투리 시간에 바둑을 뒀다”는 김뢰하는 바둑방송도 즐겨 본다는 말로 조세래 감독의 마음을 빼앗았다. 바둑돌 놓는 모습이 좋다는 칭찬까지 들은 바 있는 김뢰하인데, 정작 <스톤>에서 중요한 것은 바둑도, 액션도 아닌 힘 빼는 연기였다. 습관이란 무서운 거라고, 김뢰하는 조직의 두목을 연기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럴 때마다 조세래 감독은 손사래를 쳤다. 봉준호 감독의 단편 <백색인>과 <지리멸렬>로 영화 일에 발 담갔으니 영화 경력만 20년. 이후 줄곧 ‘연기파’ 배우라는 수식어를 달고 산 그에게 그것은 꽤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해도 남해는 조직의 보스 자리까지 오른 인물 아닌가. 그런 무서운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잔인하고 단호한 눈빛, 강인함이 기본적으로 내제돼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감독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내 딴엔 상황에 맞는 연기를 했는데 계속해서 감독님이 제지하셨다. “그렇게 인상 쓰지 마세요, 그렇게 무섭게 눈 뜨지 마세요”라면서. 남해는 지친 중년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거였다. 배역에 몰입하고 상황에 집중하다보면 순간적으로 오버를 하게 될 때가 있는데 몇 장면에선 내 연기가 과했던 모양이다.”

극중에서의 강한 모습과 달리, 무서운 (인상의) 남자일 거란 예상과 달리, 김뢰하는 선한 웃음을 곧잘 지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출발이 악역이어서 그렇지 유순하고, 나약하고, 단호하지 못한 편이다.” 그 성격과 심성은 연기에도 반영된다. 김뢰하는 상대를 배려하는 연기를 한다. 그는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이지만, 상대 배역(혹은 배우)까지 집어삼킬 듯한 연기는 좀체 하는 법이 없다. <스톤>에서 김뢰하는 조동인이 충분히 자신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신인배우를 배려한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우르르 등장했던 <몬스터>나 <라듸오 데이즈>, 드라마 <빛과 그림자> 등에서도 그는 적당히 튀었고 적당히 한발 물러섰다. 그런데 최근엔 오랜 시간 “신념처럼 생각했던” 연기 방식이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자신의 연기가 더 과감하지 못했다는 반성 아닌 반성이랄까.

“연기를 정말 무섭게 하는 배우들이 있다. 상대 배우를 어떻게든 기로 누르려고 하고, 밟고 서려는 배우들이 있다. 나는 그런 부류의 배우는 아니다. 그리고 여태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지는 5~6년쯤 됐는데, 정말 그 역할에 빠져들면 상대조차 배려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 나도 진작 그렇게 연기할걸. (웃음) 그동안은 스스로 내 한계치를 설정해뒀던 것 같다. 정말 훌륭한 배우들은 한계치를 설정해두지 않더라. 난 왜 스스로를 가뒀을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 해보지 않은 역에 대한 목마름은 나이 쉰이 된 현재도 여전하다. “요즘이 슬럼프 같다”던 그는 “남해의 대사처럼, 바둑돌을 처음부터 다시 두고 싶은 마음은 아니지만 몇수 정도는 무르고 싶다”고 했다. 달리 풀이하면 이 말은 좀더 신중해지겠다는 결심이다. 또한 유연해지겠다는 다짐이다. 그는 조금씩 그 결심과 다짐을 행동에 옮기고 있다. “최근엔 비슷비슷한 캐릭터의 변주가 아니라 곡 자체가 아예 다른 연기들을 제법 하고 있다. 그게 또 내 몸에 잘 맞다는 것도 확인했다. <라듸오 데이즈>의 작가 역할이라든지,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 까불까불대던 똘대 캐릭터라든지. 연극에서도 가벼운 터치의 캐릭터를 했고.” 지난해 김뢰하는 1인극 <품바>로 무대에 섰다. 누더기 옷을 걸친 채, 고단한 삶에서 길어올린 웃음을 만면에 띤 채 무대를 누볐다(아파트 지하실 쓰레기 더미를 거처로 삼았던 <플란다스의 개>의 부랑자 최씨도 꽤 희극적 캐릭터였다).

김뢰하는 쉰이 되고서 “공간 지각 능력도 떨어지는 것 같고, 조급한 마음도 생기는 것 같다”며 조용히 웃었다. 그러곤 “느린 삶을 살면 실수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세월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의 적정 속도를 찾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신중하게 다음 착점을 찾겠다고 말할 때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magic hour

서울역 어딘가에서 온 듯한…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부랑자 최씨를 연기한 김뢰하는 영화의 후반부에 짧게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기고 총총 사라진다. 바짝 깎은 머리 사이로 비치는 땜통이라든지, 꼬질꼬질한 손톱의 때라든지, 김뢰하는 영락없는 부랑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디테일은 사실 ‘봉테일’의 솜씨로 볼 수 있지만 강아지를 통구이해먹을 생각으로 쇠꼬챙이를 만지작거릴 때의 손동작이라든지, 경찰서에 붙잡혀가 진술할 때의 말투라든지 부랑자 최씨를 인상 깊은 캐릭터로 살려낸 건 온전히 김뢰하의 몫이었다. 촬영 전 실제로 노숙인들과 3박4일간 함께 생활했다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진 바다. 김뢰하의 코미디 연기를 더 보고 싶다는 바람을 불러일으킨 작품이 바로 <플란다스의 개>였고, <살인의 추억>의 조 형사를 있게 한 작품 또한 <플란다스의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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