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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누가 뭐래도 먹겠다!

<남극의 쉐프> <줄리 & 줄리아>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등에서 찾아보는 식도락가의 길

<줄리 & 줄리아>

비디오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고 있을 때였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죽을 때까지 마시겠다며 슈퍼마켓에서 술을 쓸어 담고 있는데 옆에서 꿈꾸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겠다… 저거 다 양주잖아.” 퍽이나 좋겠다. “저 술 다 마시고 죽는데도?” “… 죽기 전에 한번쯤은!” 술이 너무 세서 당시 25도였던 소주도 성에 차지 않았기에 편의점에서 파는 6천원짜리 캡틴 큐나 천원짜리 이과두주로 샘솟는 주량을 달래던 친구는 눈물을 글썽였다.

잘 살고 있나, 친구? 맥주 한캔으로 취하는 방법이라면서 깡통 아랫부분에 구멍 두개를 뚫고 뿜어져 나오는 맥주를 30초 만에 마시던 알뜰한 친구야(그래 봤자 안 취했지만), 지금은 어디선가 그렇게 궁금하다던 조니 워커 블랙 라벨 마시고 있기를.

그는 술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장이 소화할 수 있는 모든 물질에 무한한 애착을 가졌었다. 돈은 없고 낙지는 먹어야겠기에 산낙지를 사서 직접 손질하던 그 애 때문에 우리는 낙지 먹물까지 먹었다. 통째로도 먹는데 못 먹을 게 무어 있느냐고 구박받던 그 순간, 그건 세발낙지라고 대들 수 있는 상식과 교양이 우리에게 있었더라면.

먹고 싶은 걸 전부 해먹겠다고 요리학원 다닐 돈을 모으던 (그 돈으로 맛있는 걸 사 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애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영화 <남극의 쉐프>를 보면서 나는 그 애가 생각났다. 귀여운 펭귄과 바다표범은 없어도 괜찮다(팔다리가 짧고 얼굴이 동그란 것이 그 자신이 바로 바다표범이었으니까, 그게 사람인 까닭에 그렇게 귀엽진 않았지만), 대원들이 밤마다 훔쳐먹는 바람에 라면이 동나도 괜찮다, 얼마든지 있다는 게만 쪄주면 남극에 뼈를 묻었을 거다. 난방비로 고기를 사겠다며 창문을 비닐과 청테이프로 봉하고 한번도 보일러를 틀지 않았던 청년이다! 게다가 원작에만 나오는 사실이지만, 남극에 갈 때는 엄청난 고급 식재료가 지원된다고 한다.

<남극의 쉐프>

하지만 식도락이 즐거움을 넘어 직업의 경지에 다다르려면 맛있는 것만 먹어선 안 된다. 먹을 수 있는 건 뭐든 먹어야 한다. 한때 지상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직업 중에 ‘만능식도락가’라는 것이 있다. 돌멩이, 바늘, 철사, 질산, 들쥐, 두꺼비, 바퀴벌레…. 이런 못 먹을 걸 먹으면 사람들이 돈을 주었다고(참고로 내 친구는 불을 먹고 선배들에게 돈을 걷었다). 가끔은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어서 앉은자리에서 송아지 한 마리 통째로 먹기, 뭐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먹기만 해도 먹고살 수 있다니, 이런 직업이 어째서 사라졌단 말인가. 물론 지금도 먹는 걸 직업으로 삼을 수는 있다. 음식평론가가 되는 거다. 영화평론가가 되면 굶어 죽을 수도 있겠지만 음식평론가라면 적어도 굶지는 않겠지. <줄리 & 줄리아>를 보면서 나는 음식 기자가 아니라 영화 기자가 된 것이 못내 원통했다. 음식 기자가 되었다면 영화배우에게 다이어트 비법을 물으며 나태한 자신을 반성하는 대신 파워 블로거가 요리한 뵈프 부르기뇽 따위를 먹으면서 포동포동 살이 올랐겠… 아, 이건 안 되는구나.

하지만 영화배우라고 해 다이어트만 하는 건 아니다. 가끔은 살찌는 법에 관해 답해야 할 때도 있다. 그 옛날 데니스 퀘이드는 몸을 불리느라 종일 운동하면서 스테이크와 파스타만 먹었다고 했다. 한국으로 치면 고기와 밥이다, 고기와 밥! 그것도 소고기! 하지만 그에게 파스타란 일이었을 뿐, 사람이 굳이 안 먹어도 되는 파스타와 진정한 사랑에 빠지면 몹시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십 몇년 전의 일이다. 로마에서 <갱스 오브 뉴욕>을 찍던 디카프리오는 날이면 날마다 와인과 파스타를 먹다가… 조슈아 잭슨이 되고 말았다. 미국 드라마 <도슨의 청춘일기>의 조슈아 잭슨을 모른다고? 당신은 젊다. 그렇다면 그냥 장동건이 윤다훈 됐다고 생각하면 된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그래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보면서 걱정이 됐다. 이 영화는 놀랍게도 제목 그대로인 영화로서 줄리아 로버츠가 이탈리아에서 먹고 인도에서 기도하고 발리에서 사랑하는 영화인데(영화 한편이 3부작!), 당연하게도 기도하는 부분이 가장 재미없다. 어쨌든 줄리아 로버츠, 로마 갔다고 파스타랑 피자 너무 먹는 거 아니야? 디카프리오하고 안 친한가 보지?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다는 연예인 걱정을 하는 그 순간, 로버츠(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픽션 속의 인물인 리즈)는 옷을 사러 간다, 큰 옷을. 나폴리 피자를 앞에 두고 식욕을 아끼느니 아낌없이 지갑을 열어 아줌마 바지를 사겠다는 근성! 이것이 식도락가의 자세이다.

누가 뭐래도 밥은 소중하다. 찬란한 햇빛을 타고 식도락가의 유전자가 흐르는 나라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조슈아 잭슨으로 만든 그 나라에서, 좌파의 리더가 속을 채운 파스타의 일종인 토르텔리니를 모욕했다. “토르텔리니나 만드는… &&^%&((&$#$.” 주사위는 던져졌다. 시저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시민들은 분노했고 좌파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붉은 요새’ 볼로냐를 잃었다.

그런 것이다, 밥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다. 선거의 계절이다. 당신은 카메라에 찍히고 싶어 울상을 지으면서 삼키는 개불이 누군가에게는 한달을 용돈 모아 사먹는 진미일 수도 있고, 그거 팔아 쳐다보는 것도 아까운 딸내미, 자율학습하느라 수고했다며 떡볶이 한 그릇 포장할 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먹는 것으로 돈을 버는, 몇 백년 전에 사라진 직업 만능식도락가가 아니라면, 먹기 싫은 건 그냥 먹지 마라. 그래도 기어코 먹어야겠다면 현금은 준비하자. 모를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호떡 한개에 500원이다.

먹다가 죽는 게 소원?

진정한 식도락가가 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두세 가지 것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중국에선 의자하고 탁자하고 침대 빼고 네발 달린 건 다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산낙지 먹물까지 먹어치우던 내 친구는 중국으로 식도락 여행을 가서 먹기만 하고 오는 것이 소원이었다(미안하다, 나 혼자 갔다 왔다). 그 애가 <남극의 쉐프>를 보았다면 매우 분노했을 것이다. 팔뚝만 한 새우를 회가 아닌 튀김으로 먹는 것도 모자라서 새우 머리를 장식으로 쓰다니! 친구에게 혼나면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새우의 동그란 눈알 달린 머리를 씹어먹던 추억이 아련하다.

죽을 때까지 셰프 앤서니 보뎅의 논픽션이 원작인 드라마 <키친 컨피덴셜>에는 먹다 죽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나온다. 주인공 잭의 스승인 셰프인데, 죽을 날을 받아놓은 그는 제자에게 먹다 먹다 심근경색으로 죽는 날까지 여기서 밥을 먹겠다고 선언한다. 어디 한번 나를 죽여보라며.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는 계산을 하‘려’다가(이게 중요하다) 진짜로 쓰러져 죽는다. 제자의 레스토랑은 흉흉해졌겠지만 몇 십년을 이어온 셰프로서의 모든 업을 놓고 남이 만든 음식만 먹다 떠난 그에게 명복을.

살찔 때까지 <초콜렛>은 소설과 영화가 모두 훌륭하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결점이 있으니, 그렇게 갖은 초콜릿을 퍼먹는 사람들이 줄리엣 비노쉬와 조니 뎁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스위스에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누가 봐도 엄청나게 칼로리가 높은 음식들을 주면서 말하기를, 유기농 야채와 허브를 사용한 요리이기 때문에 살이 찌지 않는다며, 레시피 북을 선물로 주었는데… 인사하러 나타난 셰프, 책 표지에 나온 사진의 두배인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처럼 인정할 건 인정하자, 맛있는 걸 원 없이 먹으면 적어도 5kg은 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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