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졌지만 홍대 근처에 자주 가던 술집이 있었다. 주인은 프랑스 유학파였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 간판을 ‘낮술 5년’으로 바꿔 달고 대낮부터 혼자 가게에 앉아 낮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위로하는 문장을 알고 있었다. “세계가 멸망해가고 있다. 한국은 끝났다. 여기가 지옥이다.” 나는 그를 좌절시키는 문장도 알고 있었다. “세계는 멀쩡하다. 한국의 상황은 최악이 아니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적당히 극복할 것이다.”
지옥을 꿈꾸는 사회에는 살 만한 여력이 있다.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를 맞이한 공동체는 반대로 천국을 꿈꿨다. 기독교 신화로 말하자면 천국은 노예들에게, 지옥은 부자와 제사장들에게 제시되었다. 우연이 아니다. 지옥에 못 이른 자들이 지옥을 꿈꾸는 딜레마는 왜 나타날까? 현재를 지옥으로 규정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거기 함축된 주술적인 메시지는 이러하다. 이제 더 나빠질 것이 없다. 개선될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쩔 것인가? 앞으로도 상황이 더 나빠진다면? 이 세계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은지도 모른다. 기대만큼 좋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진짜 지옥이다. 아직 애도의 기간이 끝나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곳을 지옥이라고 섣불리 말하지 말라. 경건하게 애도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되 감정의 규모를 우주화하지는 말라.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의 덫이 되어 돌아올 테니. 먼저 지친 자가 먼저 모순을 범하기 마련이다. 보름 뒤에 당신은 설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 대표팀을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지옥에는 붉은 악마가 어울린다고 말할 것인가?
미래로부터 전해진 지옥에 관한 소식이 있다. 괴상한 연구에 매달려온 양자물리학자인 내 친구는 학계에서 이단 취급을 받았다. 그는 마침내 혼자 힘으로 타임머신을 만들어냈다. 100년 뒤 미래에 다녀온 그는 나에게 말했다. “많은 것이 바뀌었더라.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던 대기업도, 휴대폰 시장을 독점하던 대기업도 망해 사라졌어. 대를 이은 통치자도 없었고. 그런데 이상한 일이야. 단 사흘 머물렀을 뿐인데 평생 살았던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었거든.” 그는 얼마 뒤 좀더 체류하겠다며 커다란 트렁크에 짐을 챙겨 타임머신을 타고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너무 완벽하게 적응한 나머지 자신이 100년 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타임머신의 설계도를 가지고 떠나는 바람에 우리는 타임머신을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로 타임머신이 필요할까?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타임머신과 자동차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