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사이에 체중이 2kg쯤 는 것 같다. 도무지 맨 정신으로는 잠을 못 이루겠는 날들의 연속이었다고 하니 지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랬다. 유가족도 아닌 주제에 엄살떨지 말고 그 주둥이 좀 다물지 그래. 사랑하는 이들의 말이니 오죽 옳으랴. 그들의 충고대로 벙어리 민정이가 되고 보니 침묵 속에 당기는 건 오로지 술뿐이었다.
잔인한 이 계절의 늦봄과 초여름 사이, 늘어난 게 주량과 뱃살이라면 줄어든 건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다. 텔레비전의 거의 모든 채널은 뉴스와 지구촌 환경이나 휴먼 스토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로 채워져 갔고, 라디오의 거의 모든 채널 또한 사운드의 볼륨을 제로로 딱 맞춰놓은 듯했다. 눈이 멀고 귀가 먹은 막막한 정신적 공황 아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작게 입 오므린 노란 리본을 가슴에 혹은 심장에 새긴 채 이제나저제나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이런 국가적 초상에 완장을 찬 채 전두 지휘하는 상주가 없으니 애도하는 마음 말고 달리 방도를 모르는 착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가만히 기다리는 것밖에는 없을 터.
물론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만드는 손도 바지런함을 잃었다. 지금 내가 한가하게 책장이나 넘길 때인가 하는 압박감이 매일같이 매섭게 짓눌렀던 거다. 그럼에도 밥벌이로 삼고 있는 출판사에 출근하면 매일같이 찍어보는 게 출고 부수였다. 최악으로 곤두박질치는 판매 부수에 한숨을 내쉬다가도 그런 내 자신이 탐욕스럽게만 보여 다시금 슬퍼 죽는 소의 눈망울을 흉내내곤 했다.
때마침 오랜 팬이었던 한 성악가의 내한 공연 소식이 전해졌다. 연일 취소 또 취소, 온갖 무대가 그 흔한 변명 없이 사라져가던 참이었는데 역시나, 우리나라에서 클래식이라 하면 먹어주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1회 공연을 위해 영국에서 날아오는 예술인을 그대로 돌려보내기는 어려웠겠지. 왜 이 공연은 되고 저 공연은 안 되는지 악다구니는 나중에 칠 예정이고 어쨌거나 객석은 사람들로 터져나갈 듯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노래나 듣고 앉았어? 라는 질책과 힐난을 뒤로할 만큼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감동적이었고, 훌쩍거리는 사람들의 눈물 찍어내는 소리에 힘입어 나 또한 자유롭게 내 감정을 맘껏 터뜨릴 수 있었다.
그래서 행복했냐고? 물론 행복했다. 그래서 잊고 만 거냐고? 아이 참,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나는 온전한 슬픔에 온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시간을 내준 적이 없구나 하는 슬픈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슬픔은 지금 출발했다 약 27분21초71 뒤에 도착하면 끝이 나는 1만m 달리기가 아니다. 슬픔은 저도 모르게 찔끔 지리는 오줌처럼 웃음과 평생 그 타이밍을 함께하는 인생의 든든한 파트너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나 붙잡고 알코올중독된다고들 걱정 마시라. 나만의 애도 주량은 나만이 아는 까닭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