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때론 엉뚱과 우연이 지렛대가 되어 움직인다. KBS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의도야 무엇이건 (혼자 내몰리니 ‘빡친’ 거겠지만) 길환영 사장이 사사건건 보도에 개입한 사례를 폭로하며 길 사장도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영방송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길 사장도 ‘내가 물러날 테니 그분도 물러나야 한다’고 하면 사태가 오히려 ‘재미지게’ 일단락될 수 있었으련만, 사인을 못 받은 건지 안 받은 건지 길 사장이 버티면서 보직 간부들이 줄줄이 사퇴하고 뉴스는 반 토막이 났다. 지난번 칼럼에서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한 ‘쉬운 싸움’(농성•파업) 대신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는 ‘어려운 일’(뉴스/보도)을 해달라고 당부했는데 멍석이 깔렸으니 씨름이라도 해야 할 것 같긴 하다.
정작 ‘그분’은 길 사장의 거취 따위 챙길 겨를 없이 급조된 담화문을 발표하고 도피성 해외순방에 올랐다. 진심도 책임도 느껴지지 않는 담화 말미에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면서 닭살이 돋았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인 발언 내용보다는 화면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청와대에서 세팅한 카메라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살짝 화면을 당겼는데, 대놓고 줌인한 것도 아니고 눈길을 끌 만큼만 당겼다. 욕먹지 않을 정도만 당긴 건지 양심상 주저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청와대의 홍보 스타일을 봐서는 그조차 각본대로 했을 것 같은데 “지나친 의도를 갖고 확대해석할 수 있”으니 카메라 감독께서는 여건되시는 대로 JTBC에 알려주시길.
세월호 사건 수습을 위한 담화를 발표하는데 일문일답도 없고 그것에 항의했다는 출입기자도 없다. 자기들이 정말 청와대 직원인지 아나 보다. 줄줄읽고 받아칠 거면 뭘 굳이 언론을 거치나. 그냥 전국민에게 이메일을 보내거나 ‘대통령 말씀 앱’을 모든 스마트폰에 강제로 깔아버리면 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