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시사를 놓치는 바람에 인터뷰 전까지 익혀둔 감독의 얼굴은 포털에 올라와 있는 프로필 사진이 전부였다. 젖살이 통통하게 올라 수줍게 웃고 있는 열혈 영화 소녀. 그게 그 사진 속의 감독의 이미지였다(이 글을 쓰며 다시 검색을 해보니 최근 사진으로 바뀌어 있다. 10년도 더 된 사진이라며 민망해 하더니만 직접 바꾼 것일까?) <도희야> 속 김새론의 도발적이면서도 순수한 눈망울과 그 흑백사진 속 소녀의 미소를 몇번이나 견주어보며 정주리 감독을 만났다. 장편 데뷔작으로 난생처음 외국, 그것도 칸에 가게 된 설렘과 첫 시사에서 발견한 어긋난 사운드 싱크 때문에 녹음 스케줄을 조정하는 분주함이 한 얼굴 안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사진 촬영을 하다 잠시 들러 “칭찬 많이 해주세요”라는 배우 배두나를 앞에 두고는 어색한 웃음만 짓더니만 인터뷰가 끝난 뒤에 “두나씨는 현장에서 완전한 동지 같았어요”라며 쑥스럽게 덧붙이는 그의 모습이 조용하면서도 강단 있게 꼭 해야 할 이야기들을 풀어낸 영화 <도희야>와 많이 닮아 보였다.
-감독의 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연출 의도에 관해서는 앞의 기사 참고). =어디서 들었는지도 모르는 그 이야기가 대학교 시절 내내 나를 사로잡았었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완성하진 못했다. 그 이야기에서 결국 나는 주인의 입장일 수밖에 없을 텐데…. 그 둘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때 그 사이에서 느끼게 되는 복잡한 심경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을 파고들고 싶었다.
-요즘 한국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뤄지는 폭력에 노출된 아이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다른 작품들과 달리 접근 방식이 매우 섬세하고, 차별적인 각도에서 접근하려고 한 점이 눈에 띈다. =고향 집에 갔을 때 우연히 한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는 그 아이의 눈빛에서 두려움과 호기심이 느껴졌다. ‘나를 원하나?’(웃음)란 생각도 들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옆집 아이였고, 영화 속 도희처럼 할머니와 아빠랑 살고 있었다. 그 아이가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쳐다보던 아이의 눈빛이 계속해서 기억에 남았고, 영화의 도희 캐릭터는 고양이와 아이가 결합되어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그 아이의 눈빛에 순수함과 위험함이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도희의 캐릭터에 완벽하게 스며든 듯하다. 도희는 기존 영화가 일방적인 피해자로 묘사해온 아이들의 모습을 넘어선다. 거기엔 김새론의 연기가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새론양은 처음 이 영화를 거절했었다. 몇번이나 거듭 부탁했지만 너무 힘들 것 같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마도 이 캐릭터를 정확하게 알아본 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왜 그랬는지 물어봤더니 왠지 자기가 해야 할 것 같았다고 하더라.
-<도희야>는 단편 <11>에서의 세팅과 상당히 흡사하고, <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에도 가족간의 말 못할 상처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명확하게 말하면 말 못할 상처라기보다 뭐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는. 따지고 들어가봐야 되는 사정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도 사실 내가 만든 단편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배두나씨가 시나리오에 대해 극찬하는 것을 들었다. 시나리오 작업은 어떻게 했나. =원래 이 시나리오는 한국예술종합학교와 CJ의 산학협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트리트먼트 단계까지 선발되고 최종 시나리오에는 선발되지 못했지만 그냥 혼자서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다가 이창동 감독님이 꼭 영화로 만들어 보자고 해서 진행이 된 것이다. 일단은 처음 써보는 장편 시나리오여서 장편의 호흡을 담아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시나리오는 크게 두번 고쳤는데. 영화 속 대사들은 대부분 트리트먼트 당시부터 있었던 것들이다.
-영화에서 바다가 아주 인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고향이 바다쪽인가. =고향이 여수이기도 하고, 자라면서 본 바다가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바다를 너무 좋아하기도 하고. 영남이 밤에 처음으로 도희를 따라가다 바다와 마주하게 되는 장면은 시나리오를 쓰면서 직접 경험한 순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마냥 낭만적이지도 않고 때로는 위험하기도 하고 물론 아름답기도 한 그런 바다다.
-그런 복합성을 배경에 둔 까닭인지 영화 전반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잔잔하지만 끊임없는 반전이나 도희의 도발적인 매력이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향을 받은 감독이나 작품이 있나. =영화에서 긴장감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부러 긴장감을 유발하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기본적인 텐션이 있어야 이야기가 좋아진다. 그런 영화들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 데이비드 린치… 그리고 알모도바르. (내 영화와) 너무 다른가? (웃음) 물론 이창동 감독님 영화도 좋아하고. 이마무라 쇼헤이. 히치콕도.
-다음 영화가 기대된다. <도희야>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영화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첫 영화에서 아주 좋은 배우들을 만나서 작업했다. =이 셋이 모인 것은 누구보다 나한테 행운인 것 같다. 영화 촬영 전에 배두나씨한테도 나한테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했었다. (웃음)
-배두나가 시나리오를 보고 5분 만에 선택했다고 하던데 행운만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이 탁월한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웃음)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노메이크업으로 나와주었다. 거의 올 로케이션 촬영이라 고생이 심했는데도 다들 너무 잘 버텨주었다.
-송새벽은 기존의 코믹한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좀 의외의 캐스팅으로 보인다. =사실 시나리오상의 박용하는 나이대가 더 있어서 송새벽씨랑 맞지 않았다. 처음에는 생각도 못했는데 연극 <해무>의 스틸 사진을 보고 큰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사투리를 그렇게 맛깔나게 소화해줄 그 나이대의 다른 배우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쓸 때도 용하의 사투리를 쓸 때가 제일 신명나고 재미있었다. 마치 자기가 중심이 되는 작은 세계에서 자기가 정의라도 되는 양 으스대는 모습을 정말 잘 표현해줬다고 생각한다.
-용하를 완전한 악역으로 만드는 길을 일부러 피해간 것 같다. 성폭력에 대한 묘사도 그렇고.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단지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종류의 폭력을 도구적으로 활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표현할 자신도 없고. 스스로에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다양한 폭력이 이 영화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를 관객이 공감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오히려 그런 설정 때문에 폭력에 대해 면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왜 우리는 어떤 폭력에 대해서만 특히 민감하게 반응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와 시나리오의 결말이 좀 다르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나리오상에서는 좀더 도희의 희생이 명확하게 부각되는 식으로 그려져 있었다. 아마 도희는 영남이 오지 않았더라면 용하같이 자랐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도희가 갖게 된 영악함을 바라보면서 망연함과 비극성을 동시에 느꼈으면 했고 그게 이 영화를 만들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