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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폭력, 그 이후를 묻는 영화 <도희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대면할 때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리거나 자신이 아는 방식에 맞춰 멋대로 해석하거나. <도희야>는 상처 입은 어른이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소수자의 이름을 부르는 이야기다. 폭력에 오랜 시간 노출된 아이는 폭력의 언어로밖에 화답할 줄 모르고,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는 사이 서로의 언어는 달라져버렸다. 그 순간 불편하다고 이를 외면할 것인가, 편한 대로 이해하고 자기만족에 취할 것인가. 아니면 소통을 위해 눈을 맞추려고 애쓸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을 이름 없는 ‘도희들’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그 방법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도가니> 열풍 이후로 한국영화에서 아동들은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서 다양한 종류의 폭력 사건과 연루된 희생자로 대거 위치 이동을 감행했다. 특히 스크린에 인적 드문 곳을 혼자 걷고 있는 여자아이가 나온다면 거의 납치와 성폭행의 수순을 밟았다. 그 아이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잘못했다고 빌고 울부짖고 사건 이후 경찰서와 법원 신에서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영화에서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은 비정한 세상에 분노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하고 공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을 사적인 경로로 해소하는 방식을 택했다. 희생자인 아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아남아도 언어를 상실해버리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목소리와 존재를 지워버렸다. 그런 영화들에서 우리는 폭력의 희생자들을 직접 대면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폭력에 반응했던 그들의 육체와 정신은 묘사될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주변인들의 분노만 격앙된 어조로 그려졌던 셈이다.

정주리 감독의 <도희야>는 기존 영화에서 소거된 피해자의 자리를 정성스럽게 복원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의 이름을 정면으로 부르는 이 영화의 제목이 아주 적절해 보인다. 어떤 폭력이든 물리적 상처뿐 아니라 정신적 흉터를 남기기 마련인데 그 사정을 모르는 이에게 그 흉터는 단지 낯설고 기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렇게 흉터를 간직한 채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소녀 도희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녀는 침묵당하지도, 단지 연약하고 순수하기만 한 영혼으로 탈인격화되지도 않았다. 변화무쌍하게 다양한 얼굴과 표정과 욕망을 들이민다. 그것은 때로는 안쓰럽고 때로는 당혹스럽고 때로는 위험하게 느껴진다. 관객은 그녀를 지켜보며 보호하게 되는 영남의 시선을 통해 ‘폭력에서 살아남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태도와 시선의 윤리를 대면하게 된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피해자의 낯선 얼굴

전라도의 외딴섬에 부임하게 된 영남(배두나)은 마을의 초입에서 마주친 도희(김새론)을 보며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 영남은 곧 도희가 동네의 유일한 ‘영맨’으로 마을 대소사를 두루 챙기고 노동력까지 조달하는 용하(송새벽)의 의붓딸이자 일상적인 음주 폭행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도희는 또래 친구들의 폭력에도 쉽게 노출되어 있고 스스로를 지켜낼 어떤 힘도 갖고 있지 못했다. 처음 영남은 경찰의 의무를 행하는 범위에서 아이들을 선도하고 도희를 보호한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관심과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희는 태어나서 처음 본 존재를 엄마로 알고 따라간다는 오리새끼처럼 영남의 곁을 끊임없이 맴돈다. 이런 맹목적인 추종은 영남에게 측은함과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정주리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한 연출의 변을 고양이와 주인의 이야기로 대신했다. 주인의 사랑을 잃게 된 한 고양이가 주인에게 호의의 표시로 쥐를 잡아 신발 속에 놓아둔다. 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주인은 고양이를 두드려 팬다. 고양이는 다시 껍질까지 벗긴 쥐의 시체를 주인의 신발 안에 넣어둔다. 주인은 고양이가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고양이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를 보인 것이다.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던 이 이야기는 소통 체계의 다양성과 그 이질감에서 비롯된 오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도 일종의 소통이고 이 역시 다른 모든 소통처럼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도희는 그 고양이와 같은 존재다. 주인이 아닌 입장에서 보면 한없이 가엾은 고양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가죽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쥐의 사체를 호의로 덥석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또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다른 영화에서 무수하게 재연되었던 피해자들과 도희가 가장 뚜렷하게 차별되는 지점은 그녀가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폭력을 자신의 언어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해졌던 폭력을 스스럼없이 진술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사람처럼 묘한 웃음을 흘리기까지 한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영화 속 권순경의 말대로 그녀 안에 ‘괴물’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그 의심은 부당하지만 어떻게 보면 피해자들의 실재를 마주하게 되는 문지방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늘 보아왔던, 지은 죄도 없이 죄스러워하고 주눅들어 있던 피해자가 아니라 때로는 고개를 숙이지만 때로는 가해자의 언어를 그대로 모방하며 생존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도희’를 통해서 처음으로 온전하게 스크린 위로 스며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완벽한 보호자의 자격과 모호한 욕망의 경계

이 영화는 얼마 전 수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칠곡 계모 살인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아동 학대 사건을 떠오르게 만든다. 술에 취해 도희를 때린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용하는 이렇게 말한다. “내 애를 내가 내 맘대로 혼내지도 못허요?” 라디오에서 한 전문가는 한국 사회의 아동 학대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쉽지 않은 이유가 이 훈육과 양육의 혼동에서 온다고 말했다. 도희는 친모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나마 계부가 학교라도 보내면서 데리고 있어 다행이라는 주변의 판단 때문에 그동안 방치되었다. 영남의 등장은 폭력에 노출된 도희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일상적인 시선(혹은 시선의 부재)에 문제를 제기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에서 영남의 선택과 대처는 옳지 않다. 그녀는 경찰이면서도 도희를 제도적으로 구제하는 데는 소극적이기 때문이다(사실 현실에서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의문이다). 영화는 그녀가 그토록 소극적이고 미온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들을 치밀하게 포진해놓았다. 그것은 경찰대 출신 엘리트인 그녀가 왜 느닷없이 외딴섬의 파출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용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수다스럽지 않은 이 영화는 그 사실을 매우 신중하게 폭로한다. 관할 경찰서장에게 인사를 드리러 간 영남에게 서장은 “난 그쪽으론 편견없어. 사생활에는 관심없어. 하지만 말썽날 게 뻔한 일은 하지 말아야지.” 사생활의 영역이지만 공적 영역에서 불이익을 감수하게 만드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누구도 섣불리 입에 올려 말할 수 없는 그 취향 때문에 영남은 홀로 섬에 버려졌다. 그녀의 취향은 사회에서, 그리고 그보다 더 보수적이고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에서 그녀를 완벽하게 위축시켰고 섬 안에서 고립될 것은 물론 섬 밖의 세계와 다시 연결되려는 통로를 스스로 단절하게끔 만들었다.

그로 인해 영남은 도희를 두고 어떤 것이 옳은 행동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어떤 것이 가장 무난한 대응인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는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이뤄온 커리어를 한번에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계기가 될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그녀는 도희를 보며 자신의 어떤 위치들을 떠올리게 되고 그만큼 공감하면서도 인도적인 차원의 배려 이상을 행하지 못한다. 영남의 취향은 도희를 위한 완벽한 보호자가 되는 데 있어 근원적인 걸림돌 역할을 한다. 타인들의 시선에서나 자기 스스로에 대한 검열에서나.

영남의 성적 취향은 이 영화의 묘한 긴장감을 형성하는 데 아주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잔혹한 서사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이 영화의 주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는 바다다. 바다는 의외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한밤중에 내달리고 있는 도희를 쫓다가 영남이 불현듯 만나게 된 바다처럼 말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매혹적이고 속을 알 수 없어 음험하다. 흠씬 얻어 맞아도 춤을 추고 땀을 흘리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도희는 그 바다를 배경으로 춤을 춘다. 그녀를 바라보는 영남의 눈빛 속에는 어떤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늘거리고 있는, 불균형한 사춘기 소녀의 몸을 포획한 카메라의 시선은 매혹과 선망과 우려 사이를 위태롭게 흔들거린다. 인적 없는 바닷가에서 비키니를 맞춰 입은 영남과 도희의 시선이 말할 수 없이 도발적으로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다. 영남과 도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묘한 긴장감을 감독은 결코 건강하고 담백한 욕망으로 무화해버리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영남과 도희를 둘러싼 미묘한 분위기들은 복잡한 의미의 계열체들을 생성하고 스크린에 감금되지 않으며 실재와 조우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폭력을 견디고 돌아온, 그래서 자기 안에 괴물을 키우게 된 아이들을 온전하게 구원하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 나는 그게 감독이 굳이 스스로 많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던 영남을 도희의 뒤에 세워두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혈연적 부모들은 아이에 대해 단호한 확신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의 여러가지 제도들은 그 확신을 지지해준다. 하지만 그것이 완벽한 보호자의 요건이 아님을 우리는 숱하게 보고 듣는다. 영화 <도희야>는 스스로에게조차 확신을 가질 수 없고 주저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자리에 관객을 세워두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끔찍한 폭력의 현장에서 쉽사리 눈물을 흘릴 수 없다. 이 작품은 그 폭력의 잔해를 몇 방울의 눈물로 떠나보내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이 영화는 아이에게 가해질 수 있는 다양한 폭력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어쩌면 최근 한국 사회는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에 대해서만 유독 강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도 하게 한다. 아이들은 다양한 폭력으로 상처받고 내성을 길러간다. 올해 대한민국의 4월은 국가 전체가 공모하여 아이들에게 거대한 폭력을 자행했다. 그것이 어떤 흉터로 남게 될지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없다. 앞으로 그 흉터 때문에 아이들이 어른과 사회를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영남은 의구심에 가득 찬 눈으로 꼬마 괴물이 된 도희를 부른다. “도희야, 네가 그랬니?” 그것은 분명 부당한 질문이다. 이 영화는 결국 도희를 온당하게 부르는 길을 찾아내는 영남의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무수한 도희들을 감싸안아야만 하는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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