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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권혁웅(시인) 2014-05-23

[ 빨간 휴지 줄까ː 파란 휴지 줄까ː ]

겉뜻 귀신이 자신의 도래를 알리는 선언 속뜻 아직도 빨갱이 타령이나 하느냐는 충고

주석 지금은 양변기가 일반화되어서 시대착오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예전 재래식 변소에는 화장실 귀신이 살았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 머리 위에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거나 볼일 보는 구멍 아래서 앙상한 손을 내밀며 이런 질문을 했다. 빨간 휴지를 줄까, 아니면 파란 휴지를 줄까? 신문지 구겨서 쓰던 시절에 휴지를 내밀다니 꽤나 고마운 귀신이었던 셈인데, 그것도 컬러 휴지를 주다니 패션 감각까지 갖춘 귀신이었다. 그런데 귀신의 질문에는, 당연히 한 서린 사연이 있다.

어린 시절 운동회를 치른 기억, 다들 있을 것이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이 세상에 청군 없으면 무슨 재미로, 해가 떠도 청군, 달이 떠도 청군, 청군이 최고야. 아니야, 아니야, 백군이 최고야. 내 낭군도 우리 임금도 아닌데 해가 떠도 달이 떠도 우리는 청군 아니면 백군을 찾았다. 그런데 본래 두팀은 홍군과 백군이었다. 1455년에서 1485년까지, 30년 동안 왕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영국의 내전을 장미전쟁이라고 부른다. 내전을 벌인 당사자인 요크 가문의 하얀 장미와 랭커스터 가문의 빨간 장미 문장(紋章)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따라서 전쟁은 본래 청백전(靑白戰)이 아니라 홍백전(紅白戰)이었다. 그게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붉은색이 빨갱이 색깔이라 하여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일본도 영국도 홍백전을 치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홍군에 속하면 무조건 진다. 빨갱이는 박멸의 대상이지 운동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청기백기 게임을 기억하시는지? 청기 올려. 백기 올리지 마. 청기 내려. 백기 올려. 뭐 이런 식으로 ‘해라’와 ‘하지 마’라는 두 가지 명령어로만 이루어진 게임 말이다. 그 게임에서도 우리는 홍기를 무조건적인 억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깃발은 올리거나 내려도 안 되고 올리지 않거나 내리지 않아도 안 되는 깃발, 그냥 불태워 없애야 하는 깃발이었다. 아, 우리는 색맹도 아니면서 붉은색을 푸른색이라고 불러왔던 거다.

그나마 새로운 세기가 되면서 붉은 악마와 홍삼 광고모델인 최불암 덕택에 레드 콤플렉스가 조금은 해소된 것처럼 보였더랬다. ‘요즘은 자꾸 빨간 게 좋아’서, 2014년 현재 여당마저도 빨간 옷을 입고 다닌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색맹들께서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렇게 말한다. 종북, 종북, 종북. 정신의 딸꾹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시대착오적인 귀신이 시대착오적인 우리에게 휴지를 건네며 묻는 질문의 요지는 이것이다. 너희들은 아직도 홍백전을 청백전으로 바꿔서 노니? 너희들은 여전히 네 맘에 들지 않는 애들한테 빨간 칠을 하니? 언제까지 그럴 거니?

용례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Trois Couleurs) 시리즈는 프랑스 국기의 색깔이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를 주제로 한 것이다. 어떤 바보들은 그 감독도 빨갱이였다고 할 테지만, 나는 그 시리즈에서처럼 홍군이 청군, 백군과도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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