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했다. 이처럼 한국인들이 슬픔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게 된 건 한국전쟁 이후 처음 아니냐고. 하기는 곡절 많은 현대사의 그 숱한 비극들이 존재하지만, 다리며 건물이며 수많은 붕괴사고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생때같은 어린아이들을 한꺼번에 수장해버린 건 이미 언어 너머의 비명에 가깝다. 구할 수 있었는데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통곡처럼 한반도를 휩쓸었다. 여전히 시신을 찾지 못한 유족들의 절규가 귓등을 치고, 가까스로 일상을 추스른 사람들조차 심연의 우울증에 빠져 있다.
한국이란 나라의 추한 민낯을 목격한 탓이 크다. 도망친 선장에, 구조의 기미도 없던 해경에, 구조 대책은커녕 진도에 내려가 사진이나 찍는 한심한 정부 관료들에, 국가안전관리시스템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고 스스로의 무능력을 염치없이 실토한 청와대와 구조 책임의 주체이면서도 도리어 책임을 묻겠다는 대통령의 저 뻔뻔한 정신세계 앞에서 시민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과연 국가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되물음은 또한, 그동안 돈과 성장을 좇아 달려왔던 한국호가 사실은 아이들을 구하지도 못하는 엉망진창의 난파선이었다는 자각의 통증을 동반했다. 시민들이 이토록 무력감에 빠진 것도 너덜너덜하게 찢기고 구멍이 난 한국호 위에서 안전을 외면한 채 자신들도 노를 저었다는 공범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거다. 수치심에 얼굴을 파묻은 사람들은 그렇게 밤잠을 설쳐야 했다.
미안하지만, 재난의 주범으로 희생양을 찾아 분풀이하는 일은 손쉬운 도피다. 선장을 족치고, 해경과 해수부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애도를 마무리하는 짓은 일종의 배신이다. 책임자 몇몇을 처벌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은 또 다른 아이들을 잠재적 실종자로 방임하는 공범자들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진정한 애도는 상실된 대상을 떠나지 않는다. 애도의 철학자 데리다가 남긴 충고는 이렇다. 유령과 함께 살아라. 그것을 통해 ‘사는 법을 배워라’. 애도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유령의 말을 똑바로 듣는 것이다. 똑바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게 속절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을 애도한다는 건 그들이 우리에게 상속한 ‘부채’를 떠안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 그 어떤 잔인한 시스템이 그들을 구조하지 않았는지, 생명의 가치보다 물질 만능의 가치를 앞세운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민낯까지 샅샅이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리고 사회적 반성을 추동해 더 큰 비극을 예고하고 있는 고리원전을 중지시키고, 밀양의 송전탑을 걷어내는 일이다. 자본과 돈벌이에 잠식된 채 밑동까지 썩어 있는 우리네 삶의 공간들을 안전한 공동체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넘겨주는 일이다. 재난에 대한 애도란 사적으로 눈물 몇 방울에 양심을 휘발시키는 일이 아니라 애도 자체를 ‘정치화’하는 것이다. 너와 나는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닫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