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의 어느 날 밤, 나우필름의 이준동 대표, 리얼라이즈픽쳐스의 원동연 대표와 술자리에 동석했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제작자가 있다고 하더라. 천만 관객을 넘긴 제작자와 못 넘긴 제작자.” 은근슬쩍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천만 관객 동원을 자랑하는 원동연 대표의 농담에 이준동 대표는 이렇게 응수했다. “다른 분류법도 있다고 하던데…. 칸영화제에 가본 제작자와 안 가본 제작자. 한국에서 칸을 가장 많이 가본 제작자가 누구더라? (웃음)” 이준동 대표가 제작을 맡은 <도희야>가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다는 소식을 듣고, 술자리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그때의 농담이 다시금 생각났다. 2000년대 초 친형인 이창동 감독의 반대를 무릅쓰고 40대 중반에 영화계에 입문해 한국 영화계에 주목할 만한 족적을 남겨온 이준동 대표의 15년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는 이창동 감독의 오랜 영화적 동반자이자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겠다”라는 일념으로 <인어공주> <여행자>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 등을 제작해온 파인하우스필름/나우필름의 대표다. 지금은 신임 회장단에 자리를 넘겨줬지만 여전히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일원으로 대기업과 영화인들의 상생을 고민하는 영화계의 어른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계의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가 아닌, 제작자 이준동, 인간 이준동의 목소리를 지면에서 만나본 적은 드문 것 같다. <도희야>를 빌미로 그와의 만남을 청했다.
-<도희야>가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다. 예상했던 일인가. =이 영화가 정주리 감독의 데뷔작인만큼 (신예감독의 영화가 많이 초청되는) 감독주간이나 비평가주간에 갈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좋은 부문에 초청되었기에 깜짝 놀랐다.
-어떤 점에서 이 영화가 칸영화제 관계자들에게 어필할 거라고 봤나. =<도희야>는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가 자신을 희생해 어른도 구하고 자신도 구하는 이야기다. 내가 과문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영화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집행위원장인 샤를 테송이 한국에 와서 엄청난 영화를 봤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도희야>의 초청이 확정된 뒤에 샤를 테송을 만난 부산영화제 김지석 프로그래머에게 전화해서 “그 영화가 뭐래?” 하고 물어봤다. “<도희야>죠”라고 하더라. 우리 영화를 그가 좋게 보긴 봤구나 싶었다.
-이창동 감독과 공동 제작을 맡은 영화다. 역할 분담은 어떻게 했나. =<도희야>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영상원과 CGV의 산학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완성된 작품이다. 당연히 (한예종 교수로 재직 중인) 이창동 감독의 지도를 받은 영화이고. 어찌됐든 데뷔작을 만드는 감독이기 때문에 배우들이 불안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창동 감독이 제작자로서 충분히 영화에 무게감을 실어줬던 것 같다. 실무적으로 제작비 구하러 다니는 건 내 영역이니까. (웃음)아무래도 작품의 출발 지점부터 완성까지 이창동 감독의 역할이 중요했다. 이창동 감독이 퍼스트 프로듀서로 나서고 내가 세컨드 프로듀서를 맡았다.
-제작 크레딧을 보니 파인하우스필름과 나우필름이 나란히 뜨더라. 이 두곳 모두 대표님이 운영하는 제작사로 알고 있는데, 차이점이 뭔가. =이거 일반 관객이 알면 장사에 지장이 있을 텐데…. (웃음) 일종의 브랜드 관리다. 완성도에 방점을 찍는 작품은 파인하우스 필름, 보다 대중성을 추구하는 영화는 나우필름에서 제작한다. 두 회사가 동시에 크레딧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도희야>의 경우 파인하우스필름이 먼저 뜨고, <화이>는 나우필름이 앞에 온다. 영화를 만들때의 태도를 반영하는 크레딧이다.
-드디어 비밀이 풀렸다. (웃음) 제작사명은 어떻게 지었나. =파인하우스필름은 이창동 감독이 <밀양>의 제작사를 차리며 지은 이름이고, 나우필름은 나와 우리, ‘지금 현재(Now) 가장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자’는 뜻에서 <인어공주>를 제작할 때 내가 지었다. 서로 작명을 두고 놀리곤 한다. 나는 파인하우스필름이 건축전문회사 같다고 하고, 이창동 감독은 싼내 나게 ‘나우’가 뭐냐고 하고. (웃음)
-<도희야>는 로케이션 촬영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야기가 품고 있는 무게감이 탁 트인 풍경을 만나면서 좀 더 해소되는 느낌이랄까. =로케이션 비중이 큰 작품이었다. 강화도, 여수, 순천, 금오도 등 다양한 지역에서 촬영했다. 특히 금오도는 나에게 굉장히 특별한 장소다. 10년 전 <인어공주>도 거기에서 찍었다. 아마 <인어공주>가 금오도에서 촬영한 첫 영화였을 거다. 거기 안 가봤나? 좋~다. 금오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바닷가 풍경이 굉장히 좋다.
-신인감독의 현장인 만큼 젊은 스탭들이 많았겠다. =이번에 재미있었던 점이 감독, 프로듀서, 조감독, 배우 배두나와 송새벽이 모두 79년생 동갑내기였다는 거다. 이 ‘79’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무척 재미있었다. 나와 이창동 감독만 현장에 들어가면 평균 연령이 확 올라가고 그랬지. (웃음)
-평소 제작자로서 지양하는 점도 있나. =메이저 투자자들이 기획한 아이템을 가지고 영화를 공동 제작하는 것. 그것만큼은 내 영역도 아니고, 내 역할도 아닌 것 같다. 굶어죽고, 영화를 못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내 이야기는 내가 만들고, 끝까지 책임져야지. 지금의 영화계 시스템 안에서 대기업이 영화 기획까지 하는 데 동의가 잘 안 된다. 그걸 하려고 내가 나이 먹어 이 영화판에 들어온 건 아니라는 말이지.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종종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제작자 입장에서 흥행적인 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으로서는 만족스러운데 대중의 반응이 기대에 못 미칠 때 느끼는 서운함이 있을 것 같다. =좌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실망감은 느낀다. 어디가 잘못된 걸까 반성도 하게 되고. <화이> 같은 경우 아버지를 죽인다는 상징적인 이야기에 장르적으로 굉장히 잘 짜여진 작품이라 나름 기대를 좀 했고 배우들도 좋았는데, 관객이 많이 안 들었다는 점에 대한 실망과 반성을 많이 했다. 억울해서 <화이>를 할리우드판으로 다시 한번 만들어보려고 준비하고 있다. <판의 미로>의 제작사가 미국 파트너다. 감독은 물색 중이고.
-최근에 이창동, 박정범 감독의 신작, <맹진사댁 경사났네>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한/미 합작이 될 예정이다)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해외 베이스의 로케이션, 합작 애니메이션 등 준비하는 영화의 면모가 다양하다. 앞으로 제작자로서 더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나는 사실 제작자로서 강한 정체성이나 욕망은 별로 없다. 다만 한국영화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봤을 때, 영화의 일정 수준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투입되는 자본의 물량을 보면 한국 시장이 이제는 좀 작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해외쪽과 뭔가를 함께 만들어나가야 하는데, 그쪽 방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좋은 선례를 만들고 싶다.
-다른 일을 하다가 뒤늦게 영화 일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20대 때 연극 연출을 했다. 내 평생 30대 중반까지 내가 영화를 하고 살리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때만 하더라도 내가 바보같았지. 연극은 사회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했지만 영화는 완전히 엔터테인먼트로서만 생각해왔으니까. 그러다가 연극반 후배 중 한명이 영화를 통해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고 놀랐다. 그래서 영화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당시 이창동 감독이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에 조감독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나도 영화가 어떤 건지 한번 경험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아마 서른여섯살쯤이었을 거다. 당시 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무관리라든지 계약서를 챙기는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섬에 가고 싶다>에 제작관리로 참여했다. 우리 회사의 경리가 박광수 감독의 경리까지 하고, 사무실도 합치고. (웃음) 그렇게 영화를 경험하게 됐다.
-당시의 영화 현장에서 어떤 것들을 경험하고 느꼈나. =재미있더라. 나랑 잘 맞는 매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세상에 관심이 많고, 사람 모여 사는 일에 관심이 많은데 영화가 그런 나의 속성과 잘 맞았다. 더불어 영화적 서사를 만들어내는 느낌도 좋았다. 그런데 참여해보니 영화는 완전히 대가리 박고 하면 모를까, 딴 일을 겸하면서 엉거주춤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 당시 운영하고 있던 자그마한 회사가 안정적으로 잘 돌아가니, 영화는 내 팔자가 아닌가보다 싶어 원래 하던 일을 10년 더 했다.
-그러다가 사업을 접고 영화계로 완전히 돌아온 이유는. =딱 2000년을 맞았을 때, 내가 10년만 더 있으면 50대 중반이 되는데, 그때에도 이렇게 살고 있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을 안 하고 먹고사는 일에만 대가리 박고 사는 게…. 설마 굶어죽으랴, 후회하기는 싫다는 마음으로 40대 중반에 말도 안 되는 식으로 영화판에 들어온거다. 당시에도 나보다 나이 많은 영화인이 손꼽을 정도였다. 나이 많은 사람이 엉거주춤 영화판에 들어와 기웃기웃거리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는 많은 고통이 있었고 힘들었지만, 안 굶어죽었고, 잘했고. 가령 <시>에 출연한 윤정희 선배와 맥주를 마시다가 선배님이 “이 대표, 짠!” 하며 건배할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야, 이준동, 너 진짜 인생이 이상하게 풀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니.’ 어린 시절 나에게 윤정희 선배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별이었는데. 그런 분이 나와 술잔을 부딪히고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드는 거지.
-다시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 감독을 해볼 생각은 없었나. =없다 그러면 거짓말인데…. 지금 하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한다. 나는 사실 영화 만드는 것보다 좋은 책 한권 더 읽는 게 좋고, 좋은 책보다는 술 한잔 마시는 게 더 좋다. 매일 저녁에 맥주 한잔씩 마시는 낙으로 낮을 견디는 사람인데, 연출을 하게 되면 매일 술을 마실 수가 없잖나. 그 즐거움까지 포기하려니…. 나보다 연출을 더 잘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나는 저녁에 맥주 한잔하는 낙으로 버티련다, 이런 생각이다.
-‘낮을 견딘다’는 표현을 쓰셨는데,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관련이 있는 말인가. =나는 견딘다고 느낀다, 이 생을. 그런 점에서 부처님이 정말 탁월한 통찰을 보였다고 생각하는데, 생이라는 게 원래 고통이라고 하셨거든. 자아라는 건 원래 없고 세상도 없다. 요즘 뇌과학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데, 내가 느끼는 ‘나’라는 느낌은 정확히 말하면 뇌세포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기작용이라고 나온다. 심지어 어떤 해석에 따르면 생명이란 건 물질의 우연한 이합집산이며 언젠가는 없어질 거라고 보기도 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자체가 우리가 세계를 보고 나를 보는 본질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제작자로서 뭔가 거창한 꿈을 꾸고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다 우스워 보인다. 그럴 때마다 ‘이준동, 정신 차려 이놈아. 뭐 하는 짓이야’ 하고 경계하는 것. 그런 느낌이 나를 견디게 해주는 것 같다. 그렇게 고통스럽진 않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맥주 한잔 마시는 거지. 견딜 만해. 그러니까 사는 건 견디는 거고, 견딜 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