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헌이 아닌 다른 사람은 결코 생각할 수가 없다.”(김대우) “송승헌이라는 배우에게 씌워져 있던 굴레를 ‘김진평’을 통해 던져버리고 싶다.” (송승헌) <인간중독>에서 모두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 중인 교육대장 김진평(송승헌)은 경우진(온주완)의 아내 종가흔(임지연)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쓸린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두 사람, 최상류층 군관사 안에서 치명적 스캔들이 시작된다. 감독과 배우 모두에게 쉽지 않은 내면의 교류, 하지만 <인간중독>으로 만난 송승헌과 김대우 감독의 ‘궁합’은 더없이 좋았다. 물론 신작을 내놓는 배우와 감독이 서로에게 정직한 쓴소리를 하겠냐만 그들은 진정으로 단순한 배우와 감독의 관계를 넘어 의지했다고 입을 모은다. <음란서생>(2006)과 <방자전>(2010)을 통해 언제나 ‘사랑’을 다뤄왔다고 말하는, 그것도 언제나 ‘19금 멜로’ 세계를 그려온 김대우 감독과 지금껏 단 한번도 그런 세계에 들어서지 못했던, 하지만 언젠가 운명처럼 빠져들길 원했던 송승헌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이들의 대화는 단도직입적으로 ‘김진평’으로 시작됐다.
김대우_<인간중독>은 중반부가 넘어가면서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진평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요. 촬영 전에 만난 승헌씨는 무척 연기에 목말라 있다는 느낌이었죠. 감독으로서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고 싶었어요.
송승헌_오래전부터 김대우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했었어요.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일종의 가면을 쓰게 되죠. <음란서생>이나 <방자전>을 보면 그 가면 뒤에 감춰진 인물들의 본성을 너무 잘 그려내고 있어요. 거기서 더 나아가 코믹하고 야하게 비틀어서 풍자하는 단계까지, 정말 매력적인 영화들이죠. 꼭 한번 같이 작업하고 싶었어요.
김대우_성격상 ‘립서비스’ 같은 걸 잘하지 못해요. (웃음) 진정으로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송승헌_나는 감독님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이 계속 깨져나가는 것에서 어떤 쾌감을 느꼈어요. <인간중독>은 그의 이전 영화들과 다른 느낌이 있는데, 바로 그게 좋았어요. <음란서생>과 <방자전>, 더 나아가 시나리오를 쓰셨던 <정사>(1998)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가끔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라고 생각할 때 전혀 뜻밖의 것을 요구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쉽지만은 않았죠. 이게 말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인간중독>이 내게 갖는 의미 중 하나가 ‘내 개인의 연기’와 ‘영화 작업’이라는 말을 분리해서 생각해본 첫 번째 영화라는 점이에요. 후자의 느낌이 이번처럼 확 와닿은 건 처음이에요.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다고 할 때 감독님은 “진평이라면 더 눌러야 한다”라고 얘기하셨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감독님 말이 맞았던 것 같아요. 배우는 언제나 감정이 앞서 나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호흡이나 즐거운 긴장관계? 그런게 관객에게도 잘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군복 입은 모습이 아름다운 남자
김대우_송승헌이 군복 입은 모습은 어떨까, 처음부터 궁금한 이미지였죠. 솔직하게 처음 입었던 군복은 염두에 둔 ‘핏’이나 ‘간지’가 나오지 않아서 고민이 좀 됐어요. 그런데 원래 모델이어서 그런지 의상을 바꾸고 제스처를 더하고 그러니까 바로 김진평으로 다가왔죠.
송승헌_처음에 예비군 같아 보인다고 하셨었나? (웃음) 그런 게 의상 자체의 차이라기보다는 ‘느낌’ 같아요. 이제 막 이등병으로 들어갔을 때는 모든 게 어색해 보이지만 일병과 상병을 거치면서 몸에 맞아가는 것 같은 느낌? 똑같은 의상이 그렇게 느껴진다는 게 참 이상한 일이죠.
김대우_리처드 기어가 나온 <사관과 신사>(1982) 같은 느낌이랄까. 배우 송승헌의 연기 인생에 감독으로서 그런 멋진 한컷을 남겨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어요. <사관과 신사>에서 리처드 기어의 군복 입은 느낌은 정말 아름다워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스틸기사도 종종 승헌씨의 그런 사진을 보여주면서 “좋죠?” 하고 묻기도 했어요.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 군복 입은 채 딴생각하는 사진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좋더라고요. (웃음)
송승헌_정말 감사한 일이죠. 아무래도 배우로서는 ‘핏’이 중요하니까 사실 관리를 많이 해요. 그러다 보면 연기에 무관하게 심리적인 피로감도 생기고요. 감독님은 “진평에게 왕(王)자 필요 없으니까 밥 좀 먹어” 그러셨잖아요. (웃음) 그런데 저는 그게 잘 안 돼요. 매니저한테까지 “승헌씨 밥 좀 먹여요”라고 하셨다던데,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그런 자존심?
김대우_하긴 이해해요. 수많은 사람이 승헌씨의 몸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인데…. (웃음)
송승헌-남성다움=쾌남자 송승헌
송승헌_사석에서의 김대우 감독님은 신동엽이나 유희열급의 입담을 자랑하는 분이에요. 만든 영화도 그렇지만, 야한 얘기를 해도 거부감 없이 고급스럽고. 내가 그런 농담을 하면 “어우, 저 미친놈…” 그럴 텐데. (웃음) 감독과 배우의 관계를 떠나 정말 배우고픈 능력이죠. 저한테 야한 장난도 많이 치셨고요. (웃음)
김대우_승헌씨는 굉장히 빨리 ‘스타’ 혹은 ‘공인’이 된 터라 그를 중심으로 하나의 시스템이 만들어졌어요. 일찌감치 챙겨야 할 주변 사람도 많고, 배우라는 개인을 떠나 바로 그 시스템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떠안게 된 셈이죠. 그래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자신의 주변을 보듬어야 한다는 마음 씀씀이가 남달라요. 그런 게 현장의 배우를 좀 딱딱하게 만들 수 있죠. 그래서 난 어떤 식으로든 승헌씨의 그런 걸 풀어주려고, 가슴을 만진다든지 하는 그런… 운동을 많이 해서 A컵은 되는 것 같은. (웃음)
송승헌_감독님이 자꾸 그러셔서 이상한 소문이 나는 거예요. (웃음)
김대우_하하, 그래도 그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책임감이나 부담감이 분명 배우로서의 몰입을 방해하거든요. 게다가 감독까지 현장에서 무섭고 딱딱하게 앉아 있으면 더 그럴것이고. 어쨌건 송승헌이라는 사람을 식당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리고 타이에서의 마지막 촬영에 이르기까지 내 목표는 분명했어요. 송승헌에게서 얻어내고 싶은 것과 송승헌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이 어쩌면 똑같은 건데, 그건 바로 송승헌이 가진 남성다움을 빼서 역설적으로 송승헌을 남성답게 만드는 거였죠. 이 사람이 갖고 있는 남성성을 다 제거하고 완전히 여성적으로 만듦으로써 사실 송승헌이 얼마나 남성다운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 배우와 진짜 승부를 걸어볼 만하겠다고 느낀 지점이 바로 거기였어요.
송승헌_저는 오늘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웃음) 듣고 보니 이제야 그런 얘기를 해주시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요.
김대우_<씨네21> 같은 영화 전문지에서 대담을 할 때는, 이런 준비된 얘기들을 적당히 곁들여야…. (웃음) 아무튼 촬영 끝날 때까지 송승헌이라는 사람을 두고 마지막까지 해보고 싶었던 건 저 사람의 남성성을 내가 다 제거해볼 수 있겠다, 완전히 여성적으로 만들면 다들 송승헌이 얼마나 남성적인 줄 알겠구나, 하는 단 한 가지였어요. 이 이상 더 할 수는 없겠다 싶을 정도로 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가 가진 거부감, 불안감, 당혹감을 하나하나 다 넘어가면서 작업한 것 같아요. 촬영이 중반쯤 지났을 때 전체 회식을 가졌는데, 투자사 NEW의 한 직원이 내 귀에다 대고 ‘송승헌이 예전의 그 송승헌이 아닌 것 같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한참 적당한 단어를 고민하더니 “쾌남자가 됐어요”라고 하는데, 순간 눈물이 핑 돌았어요. (웃음) 이전까지 송승헌이 쾌남이 아니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이 배우에게 뭔가 하나의 이미지를 추가했구나 싶어서 보람이 느껴졌죠. 승헌씨 말대로 아껴두다가 지금 꺼내는 말인데, 전에 타이 숲속에서 단둘이 앉아 얘기할 때도 이런 고백은 한 적 없죠. 이렇게 얘기하면 또 오해하려나? (웃음)
송승헌_하하, 아니에요. 저로서는 많은 의문이 풀리는 것 같고, 아무튼 역시 멋진 감독님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웃음) 사실 ‘김대우 감독과 작업하고 싶다’ 혹은 ‘진한 멜로영화를 해보고 싶다’라는 것과 별개로 <인간중독>이라는 개별 작품으로 들어오면, 이들의 사랑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불륜’이라 불리고 무엇보다 ‘노출’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거든요. 하고 싶다는 희망사항과 별개로 내가 잘할 수 있을까를 더 따져봐야 했죠. 진평에게 가흔은 진짜 첫사랑이나 다름없고, 그걸 어떻게 진실된 첫사랑으로 여기게끔 관객의 마음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게 중요한 거잖아요. 감독님이 그런 목표의 나날들을 보내셨다면 저 역시 감독님을 무한신뢰한 것밖에 없어요. 이제껏 연기한 캐릭터들 중 가장 ‘잘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지만 마찬가지로 가장 감독님을 믿었던 영화라고나 할까. ‘김대우의 김진평’을 일단 믿고 가보자, 라는 도전에는 지금도 후회가 없어요. 그래서 ‘송승헌에게서 이제 배우 냄새가 좀 난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있고요. 그런 확신과 자신은 촬영이 후반부로 가면서 더 생겼고요. 흔하게 쓰는 표현이라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는데, 저에게는 진정 <인간중독>이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숫기 없는 배우와 감독의 진한 만남
김대우_승헌씨의 과거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격과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잘 맞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돌려 말하면 군인이 자신과 맞지 않다고 여기는 진평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송승헌_김진평이 저와 비슷한 면이 많다는 생각은 꽤 했어요. 사실 저는 굉장히 내성적이고 친한 사람과 있을 때와 모르는 사람과 있을 때가 많이 달라요. 연예계 일을 하다보면 약간의 가식도 필요한데, 사실 저는 그런 걸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이거든요. 좋고 싫음을 확실히 표현하는 편이어서 20대 땐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김진평이라는 인물과 더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영화에서 아내인 숙진(조여정)이 나이팅게일회라는 봉사모임 발족식에 가서 기념축사 몇 마디 해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진평이 “안 하면 안 될까?” 그러거든요. 사실 저도 그런 거 진짜 싫어하거든요. (웃음) 연예인으로서 원하지 않는 일도 해야 하고, 잘나가는 군인이라 이런저런 모임에 불려다녀야 하는 진평의 모습이 참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김대우_그런 면은 나도 좀 있어요. 사실 승헌씨하고도 촬영 들어가기 전에 문자 네통 보내고, 통화 한통 한 게 다예요. (웃음) 처음에는 ‘이 사람이 한류스타니까 그런 걸 잘 안 하겠지?’ 하는 생각에 ‘그럼 나도 안 해야지’ 한 거죠. 그런데 만나서 얘기를 나눠볼수록 나와 공통점이 너무 많은 거예요. 저도 누군가와 친해지면 완전히 달라지지만 그전까지는 힘들거든요. 그러다 나중에는 문자 말고 사진도 보내기도 했죠. 한류스타에게 이런 풍경사진 보내도 되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웃음)
송승헌_감독님이나 저나 사람 사귀는 데 족히 3, 4년은 걸리는 사람들이죠. (웃음) 나중에는 오히려 그런 부분이 편했던 것 같아요. 누군가는 ‘그게 진짜 친구냐?’ 할 수도 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간격’이 오히려 더 끈끈한 그 무엇이거든요. 결과적으로 그런 점이 영화에 긍정적으로 반영됐다고 봐요.
김대우_그래도 좀 아쉬운 건 너무 나만 다 얘기해! (웃음) 나는 첫사랑 얘기도 하고 싹 다 얘기했는데 승헌씨는 그런 얘기는 잘 안 하더라고. 건전하게 살아온 것 같아.
송승헌_원래 진짜 프로가 소문이 없는 법이에요. (웃음)
김대우_물론 둘의 연애관에 대해 얘기하다가 좀 실망하고 멀어지긴 했지. 송승헌이 그런 사람이었어? 그러면서. (웃음) 아무튼 자기 얘기는 잘 안 하면서 나만 너무 시시콜콜 사적인 것까지 다 얘기한 것 같아. (웃음) 그래서 이 사람은 연예계 생활을 오래하면서 속 얘기를 안 하는 습관이 몸에 밴 건가 하고 이해했죠. 그런데 그게 진짜 승헌씨 얘기처럼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어떤 감독은 배우와 몇날 며칠 밤새워 술 마시고 얘기하며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그 배우를 제대로 매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 배우에 대한 호기심이나 그리움이 끝까지 남아 있어야 오히려 진짜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거든요. 그래야 뭘 더 어떻게 해볼까, 이렇게 하면 더 재밌을까, 계속 궁리하게 되죠.
송승헌_저도 마찬가지예요. 천성적으로 뭔가 ‘뭉치자!’ 그런 걸 잘 못해요. 늘 그리운 마음으로 꾸준히 두고 보고 싶은 게 좋아요. 그런 점에서 김대우 감독님과는 뚝배기처럼 오래 볼 사람이라는 느낌이 확실히 있죠.
김대우_그래서 나도 승헌씨가 어느 날 뭐 산다고 내 명의를 빌려달라고 하면 그냥 빌려줄 것 같아. (웃음) 기본적으로 송승헌이라는 사람을 보면 ‘참 올바른 사람’이라고 느껴요.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은 사람 같아. <음란서생>의 한석규, <방자전>의 김주혁도 비슷한 느낌이었거든요. 어쩌면 그런 사람을 만나서 작업하느라 자주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요. 감독으로서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 그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쨌건 나는 승헌씨 나이 대와 비교하면 훨씬 못한 사람이었어. (웃음)
두 사람 모두에게 ‘깨달음’이 된 작품
김대우_세 번째 장편영화라는 점에서 <인간중독>이 나에게도 중요한 영화지만 승헌씨에게도 남자배우로서 마흔살 직전의 영화라는 점이 굉장히 큰 의미일 것 같아요.
송승헌_시작도 TV드라마였고 이후에도 TV에 더 주력했죠. 사실 영화를 통해 내 이름을 각인시키지는 못했어요. 그런 점에서 <인간중독>은 특별한 느낌이 있어요. 송승헌이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잘하는지 두고 보자, 서로 다른 시선들이 교차할 텐데 ‘배우 송승헌’으로 승부하고 싶다는 확고한 마음이 있어요. 그런 점에서 김대우 감독님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이고 김진평이라는 인물로 살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있고요. 그것이 분명 앞으로의 배우 경력, 마흔살 이후의 송승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요.
김대우_나로서도 <음란서생>과 <방자전> 두 작품을 할 때는 어떤 ‘감독’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이 없었던 것 같아요. 시나리오작가 출신이다 보니 현장 관리나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서 미숙한 부분도 분명 있었고…. 솔직히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중독>을 만들면서 ‘감독으로서 뭘 공부해야 할지 알겠다’ 깨달은 정도라고 생각해요.
송승헌_저 역시 그런 애정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유난히 기억에 맴도는 영화 속 장면이 있어요. “당신을 안 보면 숨을 못 쉴 것 같아”라고 진평이 얘기하는 장면인데, 진평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고 진실되게 얘기하는 장면이죠. 그 순간을 위해 진평이 꾹꾹 누르고 쌓아왔구나 하고 느꼈어요.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시네마 천국>(1988)인데, 사실 좀 지루하게 보다가(웃음) 마지막에 이르러 나이 든 토토가 오랜 필름을 볼 때 그야말로 ‘울컥’했거든요.
김대우_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한 장면인데, 진평이 가흔의 가방에 라이터를 넣어주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막상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을 할 때도 잘 몰랐는데, 편집하고 믹싱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유독 그 장면이 떠올랐어요. 뒷배경으로 꽃이 만발해 있고 진평이 확 일어나 가방에 라이터를 탁 넣고 앉는데, 영화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 어쩌면 이 장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게 찍어놓고 나중에 깨달은 장면이 있는 것도 <인간중독>이 처음이에요.
송승헌_듣고 보니 공감이 가는 얘기예요. 막상 촬영할 때는 몰랐지만 문득 뒤늦게 다가와 가장 오래 남아 있는 장면 말이죠. 늘 직접 시나리오를 써온 감독님 입장에서는 더 그럴 것 같아요.
김대우_<인간중독> 전까지는 내가 시나리오의 수호자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직접 감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내 시나리오를 지켜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고요. (웃음) 그런데 <인간중독>을 만들면서 결국 시나리오는 영화를 위한 재료라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그런 점에서 이전보다 훨씬 가볍고 경쾌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죠. 그래서 아까 얘기한 그 장면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그것이 어쩌면 두 사람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아무튼 승헌씨는 <인간중독>을 위해 절대적으로 스스로를 파괴했어요. 파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면 해방? 물론 나의 농간 때문이기도 하고요. 설득하다가 안 되면 사기까지 치면서 함정에 빠트렸죠. (웃음)
송승헌_5년 혹은 10년 전의 나였다면 <인간중독>이라는 작품에 들어오지 못했을 거예요. 소재도 노출의 수위도 감히 접근하기 힘들었을테죠. 어느 순간 그게 스스로 만든 벽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아무것도 없는데 늘 어깨에 쌀가마니를 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웃음) 그 벽 안에서 잘하려다 보니, 남들에게 드러나는 이미지에 신경쓰다보니 그 벽이 오히려 감옥이 됐던 것 같아요. 그 벽을 다 깨트려버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나로서는 그런 걸 깨닫기까지 힘든 시간들이었어요. 그래서 <인간중독>은 저에게 너무나 중요한 영화예요.
김대우_승헌씨는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새로운 면을 보게 돼요. 유머도 많고 의외로 다혈질이고 역시 의외로 애교도 많죠. (웃음) 무엇보다 다정한 남자고요. 나만 알기 아까운 그런 모습들을 앞으로 영화를 통해 다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그런 점에서 <인간중독>이 송승헌이라는 배우가 창공으로 비상하는 데 있어 활주로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