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뜸했다. <올란도>(1993)로 단번에 영화계를 사로잡았던 샐리 포터 감독은 1997년 <탱고 레슨>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샐리 포터 자신은 걸음을 멈춘 적이 없다. 그녀는 애초에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주목받는 댄서였고 수단에 개의치 않고 여성들을 보듬고 일으키는 일을 계속해왔다. 그리고 지금, <진저 앤 로사>를 통해 자신이 여전히 좋은 감독임을 새삼 증명한다. 90년대 페미니즘영화에 잊지 못할 족적을 남긴 샐리 포터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 전과 다름없이 근사하다.
-단도직입적으로 <진저 앤 로사>를 만든 당신은 여전히 근사하다. 영화적 활력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총명하다. (웃음) 직설적이지만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쉽진 않지만 내가 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임한 결과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다면 그곳에는 늘 에너지가 있다. 한 가지 문제라면 하고 싶은 작업을 할 시간이 충분히 있느냐는 건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긴 여정을 필요로 한다. 어떤 나라이건 마찬가지겠지만 투자를 받는 것도 쉽지 않고. (웃음)
-<진저 앤 로사>는 어떻게 시작된 이야기인가. =우리는 모든 것의 일부이고 모든 것은 우리의 일부다. 우리 삶의 가장 친밀한 부분이 글로벌한 이벤트들과 깊게 뒤얽혀 있다는 것을 간단하면서도 근원적인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냉전시대 쿠바 미사일 사태라는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각자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다루려고 했다. 거짓말과 배신, 신념의 충돌, 소멸을 향한 두려움, 미래를 향한 희망 같은 것 말이다.
-엘르 패닝과 앨리스 잉글러트의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진저 역할을 원래는 배우가 아닌 일반인 중에서 캐스팅하려 했다. 그래서 페이스북으로 2천여명의 소녀들을 물색하고 그중 200여명을 선별했는데 그 와중에 LA 캐스팅 디렉터로부터 엘르 패닝을 우연히 소개받았고 오디션을 거치면서 그녀로 확정하게 되었다. 오디션을 보던 당시 12살이었고 영화를 찍을 때는 13살이었다. 이제껏 틸다 스윈튼, 케이트 블란쳇 등 좋은 배우들과 일해왔는데, 그녀는 내가 만난 또 한명의 최고의 여배우였다. 앨리스 잉글러트는 연기 연습 과정을 찍어올린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만났다. 물론 그땐 제인 캠피온의 딸이라는 건 몰랐다. 두 배우는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금세 친해졌고 서로를 보고 배우며 함께 즐거워했다. 5주간의 촬영 동안 마치 4, 5년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배우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듯한 놀라운 경험을 했다.
-<올란도> <탱고 레슨>과 이번 작품을 비교할 때 작업 방식의 변화가 있었나. =이번 작업은 영화를 직접적으로 느끼는 데 불필요한 방해 요소를 모두 없애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화에 빠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런 이유로 촬영은 굉장히 직접적으로, 그리고 진저의 시선으로만 이야기를 그렸다. 더불어 내 집착과 미적인 습관들을 버리려고 애썼다.
-<올란도> 이후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사실 당신은 퍼포먼스 아티스트, 댄서로도 유명하다. =행위예술과 무용은 개인적으로 내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관객, 신체, 리듬, 음악, 더불어 시간과 공간을 통한 움직임의 예술 같은 부분을 많이 배웠다. 현실적으로도 모든 영화감독은 이러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내게 행위예술과 무용의 경험은 영화감독이 되기 위한 트레이닝이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춤추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탱고 레슨>은 자전적인 영화였는데, 이제 그런 자전적인 영화는 더이상 만들 생각이 없나. =물론 내 삶과 모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미긴 했지만 <탱고 레슨>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영화를 통해 탱고를 배웠고 심지어 그 영화가 다큐멘터리라고 믿었다. <탱고 레슨>에서 관객이 느낀 혼란을 보고 이후로는 자전적인 영화와 픽션을 좀더 뚜렷이 구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나 미술에서 일부러 그 선을 흐리게 하는 걸 보면 재미있다. 픽션이 진실을 보여주기에 더 효과적인 도구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것은 더욱 흥미로운 퍼즐이 될 수 있다.
-1960년을 시대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1962년이 영화의 배경인데, 오히려 1950년대 말에 더 가깝다. 하지만 1960년대는 상징적인 시기다. 아무도 차후 10년 동안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몰랐고, 심지어 다음 10년이 또 올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많은 사람이 1962년이 세상의 마지막일 것이라고 두려워했으니까. 개인적으로 그 시절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들이 많다. 당시 13살이었던 나도 세상이 멸망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꼼꼼한 시대 재현이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다. 굉장히 노력을 기울인 것 같은데. =최대한 진실되게 그리고 최대한 리얼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촬영감독 로비 라이언과도 유연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함께 작업했다. 영화의 대부분은 핸드헬드로 촬영했고, 단 하나의 룰은 모든 것을 진저의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거였다. 그녀가 이야기의 중심이며 모든 장면의 비주얼적인 중심이다. 망가진 도시경관의 느낌을 살리고 싶어 이스트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터에서 촬영한 장면이 있는데, 이때 중요한 건 실제 런던의 총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소녀들이 보고 느끼는 것을 표현하거나 반영하는 일이었다.
-진저와 로사 사이의 미묘한 갈등에 반해 사건의 중심에 있는 롤랜드는 모든 갈등과 관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롤랜드는 자신의 감정과 지식에 휘둘려 이쪽저쪽 끌려다니는 모순적인 캐릭터다. 영화에서는 그를 평가하는 것이 아닌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스스로 원하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딸을, 아내를, 그리고 어린 연인까지도 다치게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무엇을 하든 자신을 가두는 감옥을 스스로 만든 셈이다.
-사람들은 그저 변하는 것뿐일까. 아니면 성장하는 걸까. =누구에게나 십대 시절은 혼란스럽다. 처음으로 비밀스럽게 독립적인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때니까. 십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잘못된 점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아직 책임을 지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성장이라는 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에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배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즐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마지막 장면, 진저가 미래에 대한 시를 쓰는 롱테이크 장면이 인상 깊다. =그 장면에서 진저만큼 중요한 건 롤랜드다. 그가 가만히 있다는 사실은 관객이 진저가 무엇을 쓰고 생각하는지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동시에 롤랜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상상하게끔 하고 싶었다. 진저는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겪었지만 시를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로 향하는 길을 찾은 거다. 나는 그녀의 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 긍정의 희망을 전달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