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상품보다 화면만 기억되는 광고처럼 내용보다 제목이 오래 남는 영화가 있다. 임창정 주연의 <파송송 계란탁>(감독 오상훈, 2005)은 좋은 영화지만 제목만 들으면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보다 라면이 먹고 싶어진다. 실제로 라면에 파를 송송 썰어넣고 계란을 탁 깨서 끓여먹은 이도 많았을 것이다. 영어 제목도 ‘파송송 계란탁’(Son, My Enemy, Pasongsong Gyerantak)이라니. 라면과 계란의 조화는 환상적이지만 어떤 식탁에서는 그렇지 않다. 원래 이 글의 제목은 ‘라면이 문제일까 계란이 문제일까’ 혹은 ‘계란이 더 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죄 없는 라면과 계란에 ‘문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세월호 사건을 둘러싼 ‘가해자들’의 말과 행동은 시간이 갈수록 점입가경이어서 모두가 정신이 붕괴된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내 생각에, 압권은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비보도를 전제로 기자들과 나눈 대화에서 “(서남수 장관이) 라면에 계란을 넣어서 먹은 것도 아니고, 끓여먹은 것도 아니다. 쭈그려 앉아서 먹은 건데 팔걸이의자 때문에, 그게 사진 찍히고 국민정서상 문제가 돼서 그런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2위’는 “미개한 국민”에 자신은 속하지 않는다고 믿은 재벌 아들). 일단, 라면과 거리가 먼 사람의 말이다. 컵라면 온도에 계란은 무리여서 ‘컵라면에 계란’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성폭력 이론 중에 ‘2차 가해’(second rape, social rape)라는 말이 있다. 물리적 사건 이후 사회적으로 만연한 가해자 위주의 해석을 말한다. 당한 일도 억울한데 가해자는 당당하며 피해자는 비난받고 법적 처벌까지 받는 상황. 피해자는 폭력 피해와 더불어 여성의 성에 대한 편견으로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이 말은 성폭력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폭력에 적용할 수 있다. 물론 이번 사건은 성폭력과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사건 이후 당국의 대처와 행태는 2차 가해의 모델이라 할 만하다. 나는 ‘세월호’가 구조적 문제라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구조적 문제라고 해서 개인이 면죄되는 것은 아니다. 구조는 매 순간 구체적인 개인이 만드는 것이다. 구조와 구조주의적 시각은 다르다.
타인의 죽음이나 고문보다 티도 안 나는 자신의 상처가 더 아파 죽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도 가이드라인이 있는 법이다. 청와대 대변인에게는 바닷속을 헤매는 영혼과 그들의 마지막을 기억하려는 가족, 그리고 얼이 나간 국민들보다 계란도 안 먹은 동료가 욕을 먹는 것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나보다.
개인적으로 나는 (구급 용품을 치우고) 라면을 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라면이 아니라 백반을 시켜먹었다 해도, 팔걸이가 아니라 소파에 앉았다 해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행위에 대한 해석이다. 라면이 아니라 거기 더해진 계란 담론이 진짜 문제다. 이 발언은 매우 심각한 인지 장애, ‘사이코패스’ 수준이다.
청와대 고위직이라고 해서 ‘사회 지도층’ 공무원이니 공복으로서 봉사 정신까지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월급쟁이의 직분으로서 기본 인식은 있어야 하지 않나. 이런 진부한 말밖에 … 할 말이 없다. 이들과 어떻게 한 하늘 아래서 살아갈까. 나는 그것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