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겠다던 정치인의 아들이 분노하고 오열하는 이들(을 포함한 우리)에게 ‘미개’라는 단어를 써 문제가 되었을 때, 저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해주었을까 궁금했다. 누군가가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네가 한평생 얼굴을 모르고 살 사람들일지라도 그들 입장에서 생각하고 도울 게 없는지 생각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침묵하며 애도하라고, 그런 말을 해주었을까. 그리고 동시에 생각한다. 저기서 일을 이 지경까지 몰고 간 많은 일들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관행을 운운하며 적당히 눈감고 넘기려는 마음이 무언가를 단단히 그르치고 있지는 않은지.
“그전에는 솔직히, 데모하기 전에는 뭐 용산참사라든지 쌍용자동차라든지 그런 사건들, 강정마을 뭐 저런 사건들, 다들 남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일하고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일을 하고 나면서부터, 내가 데모를 하면서 정부에서 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왜 저 사람들이 옥상에 올라가면서 저렇게까지 했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세상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지예, 이거 하면서. 정부가 얼마나 우리 국민을 우롱하면서 정치를 하는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갖고 노는 거지, 완전.”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미개’의 증명으로 보일지도 모를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외침이 여기 있다. 여기에는 시위꾼도, 이념도 없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살게 해달라는 낮은 목소리만이 있을 뿐이다. <밀양을 살다>는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 17명, 15편의 구술기록이다. 그 옛날부터 구전된 흥 넘치는 <밀양아리랑>은 “날 좀 보소”라고 노래하지만 21세기의 <밀양아리랑>이 쓰인다면 “살려주소”라고 운을 떼야 할 판이다.
남의 일이라고, 저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귀 막고 눈 돌려서는 안 된다는 호소가 여기 있다.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할 많은 이들이 저기 있다고 잊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눈앞의 ‘내 것’의 문제만 아니라면 어찌 되어도 좋다는 마음이 결국 우리를 자꾸 울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손실과 이득을 비교하는 숫자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인간이고 목숨이다. <밀양을 살다>는 그런 사실을 전하기 위해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육성을 빌려온다. 구수한 말솜씨와 반세기 정도는 우습게 넘기는 삶의 이력이 현재의 어려움과 한덩이가 되어 쏟아져나온다. 말글이 주는 살가움은 이 책을 정말 놓기 어렵게 만든다. 좋은 시절을 아이들이 학교 다니던 시절로 꼽는 어르신이 “내게 그 삶이 한번 더 오면은 즐겁게 한번 더 인생을 바까가 살아봤으면…”이라고 말할 때, 평범하지만 살갑게 와닿는 사연들은 힘을 갖는다. 미소를 나눈 타인의 고통에 눈감기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