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이라는 말은 “임금의 분노”를 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 <역린>은 정조의 역린에 관한 것이다.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현빈)가 왕위에 즉위한 지 1년여가 지난 시점, 여전히 왕권은 공고하지 않다. 공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조는 시시각각 암살의 위협에 시달린다. 그를 지키는 건 곁에 둔 충직한 내관 상책(정재영)과 금위대장 홍국영(박성웅), 그리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김성령) 정도다. 강력한 노론 일파와 왕대비 정순왕후(한지민)는 마침내 검객 살수(조정석)를 위시한 암살단을 앞세워 정조 암살을 모의한다.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 등의 TV드라마를 연출한 이재규 감독의 영화 데뷔작이다. 고증과 창의가 적절하게 섞인 듯한 소도구나 복식, 거기에 큰 공이 들어간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그것들이 큰 매력 중 하나다. 정조를 주인공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주•조연이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 지닌 각자의 역할이 분명해서 서로 맞설 때마다 팽팽한 감이 있다. 특히 정순왕후와 정조가 영화 초반부에 서로 은근하게 밀고 당기는 정치적 협박은 가장 볼만하다. <역린>이 부분적으로는 집중도와 밀도감이 높은 영화라는 걸 입증하는 장면이다. 그런 장면들이 모여서 영화 전반의 고른 균형미를 이뤄낸다. 하지만 여기에 바로 문제도 함께 있다. 균형을 맞추고자 한곳에서 활동이 멈춰 있다. 인물들은 그 누구도 훼손당하지 않았고 사건도 기승전결을 다하고 형식 또한 단 하루의 일이라는 유별난 특이성을 지녔지만 그렇게 요소들이 다 모이고 나니 영화는 너무 적당한 곳에 걸려 있는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