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귤을 좋아했다고 한다. 내 아이도 귤을 좋아한다. 그 아이의 아비는 방송 인터뷰 내내 놀라우리만치 침착했다.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면 저런 표정과 말씨가 나올 수 있을까. 세상 그 어느 비통함이 눈앞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속수무책 지켜보는 것과 견줄 수 있을까. 그의 딸은 결국 사망자가 되어 아비의 품에 돌아왔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라는 뜻으로 공권력의 독점권을 쥐어줬건만, 제 발로 나오거나 물에 뛰어든 이들 외에 단 한명도 국가는 구하지 못했다. 객실 창문 안에 아이들이 어른거렸지만 해경 구조대원들은 그저 손닿을 곳에 있는 사람만 ‘줏어’ 올렸다. 단 한명도 구하지 못한 정부는 단 한분을 위해서는 총가동됐다. 우리가 고통스럽게 목도하다시피 엉망진창인 것은 세월호만이 아니다. 촌각을 다투는 긴급 구조가 필요할 때 그 일을 할 사람들은 눈치만 보느라 정신없었다. 아무도 전권을 쥐지 못했고 누구도 앞장서지 않았다. 수몰되는 사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보다 나중에 떨어질 상급자의 질책에 귀를 세웠다.
급기야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라는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가 나왔다. 사람은 위기를 겪고 바뀌는 게 아니라 위기를 겪을 때 자신을 드러낸다. 때이른 “엄단과 처벌” 지시에 이어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을 향해 “살인죄” 운운한 발언을 마지막으로, 대통령의 지시와 언급은 없다. 규제 완화부터 통일 준비까지 직접 챙기며 정부 각 부처의 업무들을 사실상 청와대로 빨아들이는 걸 전 국민이 아는데, 이번 참사에 대해서만 유독 안전행정부 소관으로 돌리고 있다.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청와대와 세월호 선장은 뭐가 다른가. 각자도생의 컨트롤타워는 청와대였다. 국가와 국민간의 계약은 가장 최악의 모습으로 침몰했다. 우리에게 남은 기적이 있다면 최소한의 복원력일 거다. 상식의 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