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숙 만화가에게 명함을 받았다. 거기엔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하는 만화 <꼬깽이>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작가님과 꼬깽이가 닮은 것 같아요” 했더니 김금숙 작가가 다들 그렇게 얘기한다며 까르르 웃는다. 시골 골목대장 같은 외모와 밝은 성격을 지닌 그는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다. 조각을 배우러 유학을 떠났다가 만화가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최근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를 원작으로 한 만화 <지슬: 제주 4.3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하 <지슬>)를 그렸다. 영화처럼 흑과 백으로 표현한 그림은 그가 4년째 배운다는 판소리처럼 쉽사리 설명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아름답다.
-<지슬>은 어떻게 하게 됐나. =출판사에서 제의가 왔을 때 사실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였다. 포스터는 봤다. 첫눈에 반하는 스타일인데 포스터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군인 한명이 반대편에 젊은 여성, 누이 같기도 하고 연인 같기도 한 사람을 총으로 겨누고 있는데 그 모습에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이 다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았다. 포스터로만 70% 해야겠다 싶었다. 영화를 보면서는 이미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지슬>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전쟁이나 학살을 소재로 했을 때 폭력을 폭력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슬>은 그렇지 않았다는 거다. 오멸 감독님이 제주도 분이시지 않나. 상처를 잔인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따뜻하게 감싸는 부분이 좋았다.
-<지슬>을 하면서 “춤추듯이 그렸다”는 표현을 했다. 어떤 느낌인가. =작업을 서서 한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 보면 손의 움직임이 좀더 자연스럽다. 작업을 하다가 답답하면 판소리도 한 자락하고 부채를 이렇게 펼치기도 하고 말 그대로 춤도 췄다. 춤을 배운 건 아니지만 춤에 에너지가 있듯이 붓의 움직임에도 강약이 들어가니 붓의 흐름도 하나의 춤이다.
-<지슬>은 원작이 있어서 오히려 힘든 부분이 있었을 듯하다. 원작 영화에서 많이 바꾸진 않았다. =감독님이나 영화를 만든 사람들만 알 수 있게 조금씩 변화를 주었다. 영화를 본 대중은 모를 수도 있다. 순덕이와 만철이의 사랑이 영화에서는 잠깐 드러나는 정도인데 둘의 이야기를 더 보여주고 싶은 애잔함이 있어서 그 부분을 넣었다. 영화에는 없는 부분인데 춘섭이와 춘자라는 아이들이 놀다가 태풍이 온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 제주도에서는 “태풍이 온다”는 표현을 잘 안 쓴다고 한다. 학살의 위험을 날씨로 대신 표현한 거다.
-제주도에 출판사 편집자와 같이 여행을 갔을 때 태풍을 만났더라. =(웃음) 미친 짓이었다. 위험한 태풍이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도움이 됐다. 영화에서 순덕이 어멍, 엄마가 동굴에 들어가면서 이런 말을 한다. “바람이 부려냐….” 육지 사람들은 바람은 그냥 부는 거 아닌가 생각하지 않나. 그래서 만화에서는 바람을 태풍으로 고쳤다. 제주도에 가서 보니까 그 바람이 그 바람이 아니었다. 또 느낀 것이 옛날 돌담, 현무암이 서로 맞대고 서로를 지탱하는 모습이 애잔해 보였다. 제주 도민들 같았다. 가까이 가서야 몸으로 느꼈던 것 같다. 똑같은 돌을 그려도 그 돌이 그 돌이 아니게 된 거다.
-영화 <지슬>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인 제주 사투리에 대한 고민도 있지 않았나. =영화는 자막이 가능한데 만화는 자막을 넣을 수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주도 사투리를 느끼면서 이해할 수 있게 ‘~했수꽈?’처럼 동사의 변화나 어멍같이 익숙한 것 정도만 넣고 나머지는 표준어로 대사를 만들었다. 그런데 책 나오기 바로 전에 다 수정했다. 영화쪽 사람들이 이건 안 된다고 했다. 사투리를 하려면 완벽하게 하든지 모두 표준어로 하라고 하셨다.
-원화가 정말 좋을 것 같다. 전시도 몇 차례 했던데 원화가 있어서 가능한 것 같다. =안 그래도 내년 1월에 앙굴렘만화페스티벌에 맞춰 <지슬>이 프랑스에서 출간이 되는데 전시도 알아보려고 한다.
-<아버지의 노래>를 출간했던 그 출판사에서 나오나. =같은 출판사다. 대사도 없는 원화만 몇장 들고 갔는데 그 출판사 분도 첫눈에 반하는 스타일이어서 그 자리에서 출간하자고 하더라.
-프랑스에 있을 때 한국 만화 번역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만화를 하게 된 건가. =사실 만화를 예술로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런데 웃긴 게 내가 다닌 미술학교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만화 학교다. (웃음) 프랑스의 대가들이 다 거길 나왔다. 만화 수업을 한번 들었는데 첫 수업에서 상반되는 두 캐릭터를 잡아오라고 하더라. 칭찬을 듣긴 했는데 며칠을 캐릭터에 대해 고민했더니 생머리가 아프더라. 조각보다 더 어렵다 싶고 만화는 아닌가보다 했다. 학교 다닐 때 조각에 재능이 많다고 선생님들한테 칭찬을 많이 들었다. 큰 조각가가 될 거라고 그랬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 전시를 해도 작품이 팔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만화 번역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관심이 생기고 조각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화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아버지의 노래>인가. =사연이 많은데 장편을 준비하면서 몇번 거절을 당했다. 다른 시나리오작가랑 작업을 했는데 잘 안 됐다. 그래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끄집어내야겠다고 해서 한 게 <아버지의 노래>다. 번역 작업을 다 끝내고 몰입해서 했다. 그림을 20장 정도 그리고 번역 일을 했던 출판사가 아닌 모르는 출판사에 보냈다. 당장 전화가 왔다. 상업성은 정말 없다, (웃음) 정말 상업성은 없는데 이건 너의 이야기지만 프랑스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지슬>보다는 자전적인 이야기인 <아버지의 노래>가 만화가 김금숙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작품인 것 같다. =맞다. <아버지의 노래>가 첫 장편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국의 현대사를 산 여성이 겪어야 했던 걸 어머니를 통해 풀었고, 이농현상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또 80년 광주 얘기를 꺼냈다. 깊게는 못 들어갔다. 90년대에는 도시 재개발, 철거민 얘기를 꺼낸다. 이게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서민들 이야기다.
-올해 나올 판소리 만화도 기대가 된다. =외국 살면서 그런 걸 많이 느꼈다. 우리 문화유산이 정말 아름답고 최고의 예술이다. 외국 나가면 다 애국자 된다고. (웃음)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는 어렵고 한이 맺혔고 이런 식으로만 생각한다. 판소리를 4년 정도 배웠는데 사실 대사들이 웃기고 재밌다. 말장난이 장난이 아니다. 우선 듣는 귀를 가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를 듣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화를 해야겠다 싶었다.
-삶을 다채롭게 사는 느낌이다. 만화가로 활동하고 판소리도 배우고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일도 한다. <피부색깔=꿀색>의 전정식 작가와는 친구라고 들었다. =정식이는… 아니 전정식 작가는(웃음) 프랑스 있을 때 만화가 데뷔하기 전부터 알던 사이다. 나에게 용기를 많이 줬다. 곧 한국에 온다고 하는데 <아침마당>(KBS1)에 출연한다고 자랑하길래 나도 출연했다고 그랬다.
-국안인으로 출연한 거 아닌가. (웃음) 농담이다. 앙굴렘만화페스티벌에 초청된 종군위안부 할머니 관련 단편 <비밀>로 출연한 걸 봤다. =위안부 할머니의 여러 증언 중에서 이용수 할머니의 이야기가 와닿았다. 당시 가난한 소녀였던 할머니가 알고 보니 위안소 소장인 남자가 보여준 예쁜 신발과 치마에 속아 금방 돌아오겠지 하고 따라간다. 여자로서 그 소녀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간혹 할머니들의 기억이 진실이 아니고 꿈처럼 혼돈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 이야기는 당시 소녀였던 그녀의 마음이 더욱 애잔해 만화로 옮겼다.
-<지슬> <비밀> <아버지의 노래>까지 4.3, 종군위안부, 광주 민주화운동 등 현대사의 아픈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런 이야기에 끌리는 건가. =끌린다. 몸으로 느껴서 그런 것 같다. 부모님의 연세가 많다. 어머님이 살아온 얘기를 항상 듣고 자랐다. 8남매 중 일곱째인데 오빠들도 아픈 시대를 산 사람들이다. 이런 가족들과 살다 보니 지금 40대지만, <지슬> 작가의 말에도 썼는데, 꼭 100살 같다. 내가 만화가로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그런 아픔들을 예술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이야기할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꼭 해보고 싶은 주제나 이야기가 있나. =꼭 하고 싶은 작품은 광주에 대한 거다. 다른 시각으로 하고 싶다. 아직은 공부를 해야 하고 그 와중에 내 마음에 꽂히는 이야기,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선택해야 할 것 같다. 이제 시작인 것 같다. 어떤 작품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됐다.
<아버지의 노래> <꼬깽이>는 어떤 작품?
<꼬깽이>는 <아버지의 노래>로부터 태어났다. 김금숙 작가 본인과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의 노래>에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만 따로 떼어낸 작품이 <꼬깽이>다.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한 <꼬깽이> 1권 ‘시골 이야기’가 지난해 출간됐고 곧 2권 ‘달동네 이야기’가 나온다. 2012년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됐던 <아버지의 노래>는 시골에서 태어나 마냥 행복했던 9남매의 막내 구순이의 눈으로 본 가족 이야기다. 구순이는 서울에 오면서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프랑스행을 택한다. <아버지의 노래>는 2012년 9월 몽펠리에 만화 페스티벌 NMK에 초청받아 ‘문화계 저널리스트들이 뽑은 언론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