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시작한 부산국제단편영화제가 올해로 벌써 31회를 맞이한다. 4월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 부산 영화의 전당과 모퉁이 극장에서 진행될 이번 영화제는 전세계 단편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한국 단편영화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우선 공식경쟁섹션에서는 94개국, 2076편의 단편영화 출품작 중에서 32개국, 52편의 작품들이 최종 선정되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애니메이션(8편)이나 다큐멘터리(8편)에 비해 극영화(36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지만, 출품작들의 비율을 따져본다면 최종선정된 52편은 양질의 단편영화들을 다양하고 균형 있게 소개하려는 영화제쪽의 노력을 느낄 수 있다.
먼저 가출한 청소년들이 모여 만든 ‘가출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이환의 <집>은 집을 뛰쳐나와도 결국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청소년들의 답답한 심정을 한 소녀의 시각에서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이 한국의 청소년 문제를 그리고 있다면 김유리의 애니메이션 <기러기 아빠>는 몇년 새 큰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기러기 아빠’들의 삶을 애니메이션만이 가능한 상상력으로 보여준다. 재치 있는 표현력이 눈에 띄지만 무엇보다 기러기 아빠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감독의 마음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룩셈부르크 애니메이션 <미스터 위블로>도 경쟁섹션에 초대됐다. 기계로 가득한 세상에 외롭게 살고 있던 위블로씨가 버려진 강아지를 키우면서 소소하지만 온정 넘치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각각의 귀여운 에피소드들과 미소 짓게 하는 결말까지 빈틈을 찾아보기 힘든 수작이다. 라파엘 나바로 미뇽의 <삶을 노래하는 자>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중간에 서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사색적인 작품으로, ‘전방위 예술가’인 감독 자신이 직접 출연해 노년에 접어든 부부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여준다. 남편은 영화 내내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을 반복해서 틀어놓는다. 하지만 감독은 이 동일한 곡을 서로 다른 가수의 버전으로 들려줌으로써 수십년 반복된 일상이 ‘같은 곡, 다른 버전’의 이 노래처럼 매일 새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다큐멘터리 작품들도 놓치지 말자. 이미 전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는 다큐멘터리 <미네리타>는 볼리비아의 한 광산도시에서 착취당하며 살고 있는 세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재의 강도만큼이나 세련된 촬영과 매끄러운 편집이 극영화 못지않은 영상미를 선보인다.
부산국제단편영화제는 2년 전부터 전세계 중 한 국가를 선정하여 그 나라의 단편영화들을 폭넓게 소개하는 ‘주빈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의 주빈국은 스페인이다. 지난 10년 동안 스페인에서 제작된 주목할 만한 단편영화 8편이 파노라마 부문에서 소개될 예정으로, 스페인을 대표하는 두 단편영화제 메칼 바르셀로나단편영화제와 필메츠 바달로나단편영화제를 거쳐온 호러영화들과 애니메이션들도 놓치기 아깝다. <관성적 사랑>은 사랑이 식어버린 커플이 느끼는 감정을 ‘로모키노’라는 일종의 스톱모션 기술로 담아낸다. 사랑을 고백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뮤지컬영화의 한 대목처럼 연출한 <아침 7시 35분>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두편 모두 단편영화가 가질 수 있는 실험정신과 창의적인 표현 가능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가장 많은 기대를 모으는 분야는 스페인 호러영화들일 것이다. 그중 <잔혹한 휴식>은 메칼 바르셀로나단편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추천의 말처럼 ‘공포와 유머가 공존하는’ 작품이다. 바닷가로 놀러간 주인공이 그곳을 덮친 외계인의 공격에 맞서 싸운다는 이 작품은 살이 뚝뚝 뜯겨나가고, 사지가 아무렇지 않게 절단되는 장면들을 관객이 안심하고 낄낄대고 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엔딩 크레딧까지 꼼꼼하게 챙겨보기를 추천한다. 애니메이션 부문에 속해 있는 <성스런 기계 4>는 그림자극 방식의 애니메이션으로, 인간이 어떻게 지구를 착취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어떻게 멸종할 것인지를 군더더기 없는 상징적 이미지와 황홀할 정도의 리듬감으로 압축적이고 강렬하게 전달해낸다.
클로즈업 섹션에서는 ‘오버하우젠 선언 특별전-낯선 시간으로의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1960년대 독일 단편영화들을 소개한다. 1962년 오버하우젠국제단편영화제에서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고 외치며 새로운 영화의 시작을 선포했던 당시 젊은 감독들의 작품을 5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꺼내보는 것은 최근 단편영화 제작의 흐름을 점검하는 좋은 잣대가 될 것이다. 특히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60년대 독일의 단편이라는 여러 제약 때문에 극장에서 쉽게 만나기 힘든 작품들이니 놓치지 말자. 독일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의 기억들을 뉘른베르크에 남겨진 건물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돌 속에 숨은 야만>과 그림과 텍스트, 스크랩된 신문기사의 이미지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사건들을 표현해낸 독특한 형식의 작품인 <바이마르 공화국 포스터>, 스스로 줄을 끊고 나온 마리오네트 이야기를 일종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담아낸 <꼭두각시> 등 전후 독일의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과 영화미학에 대한 순수한 실험정신을 찾아볼 수 있는 영화들이 다양하게 소개된다.
칸국제영화제나 베를린국제영화제 등 세계 주요 영화제를 다녀간 단편을 소개하는 ‘커튼콜 섹션’에도 7편의 작품이 준비되어 있다. 올해 개막작 중 한편인 <라파엘의 길>은 지난해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단편부문 미래의 표범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나폴리 교외에 살고 있는 어린 소년 라파엘의 일상을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에서 담아낸다. 2013년 탐페레국제단편영화제 대상 수상작이자 단편영화 특유의 높은 몰입도를 보여주는 <더 매스 오브 맨>, 인도의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 어린 시크교 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을 현실과 이야기 사이의 훌륭한 균형으로 그려내 2013년 베니스국제영화제 단편부문 오리종티상을 수상한 <커쉬>도 소개될 예정이다.
‘주빈국 프로그램’의 프리퀄 격인 ‘프리퀄 오브 스웨덴 섹션’에서는 2015년 주빈국으로 선정된 스웨덴영화를 미리 만나볼 수 있다. <소사이어티>는 컨테이너에 탄 밀입국자 이야기를 흑백화면에 담은 작품으로, 좁은 공간, 한정된 빛, 다수의 인물이라는 연출상의 제약을 오히려 효과적으로 활용한 수작이다. 중년 부부가 겪는 황당하지만 과하지 않은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담은 <어느날 갑자기>는 현실 속의 상상을 적절하게 녹여내 마치 잉마르 베리만과 팀 버튼을 동시에 만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외에도 아직은 우리에게 낯선 스웨덴영화의 목록을 넓혀줄 다양한 작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기대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