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레이스2000>

<데스레이스2000>

Intro

우린 모두 알고 있다. <시네마 천국>을. 영화로 꿈꾸던 꼬마 토토와 꿈지킴이 알프레도와의 우정, 그리고 그 아름다웠던 키스 장면들.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사위원같은 신부님이 미친 듯이 검열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교훈을 주던, 그 <시네마 천국>.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지 못한다. 시네마지옥이 있다는 것을. 시네마 파라디소의 정반대말, 시네마 인페르노. 지옥이니 아름다울 리 없다. 요상하고, 이상하고, 망측한 영화들이 즐비한 지옥이란 말이다. B무비? 시네마지옥은 B무비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CDF급 망작들을, 한편도 아니고 예닐곱편을 연달아서, 그것도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새벽 7시까지 밤새도록 달려보는, 정말 버텨야 하는 지옥 같은 영화 상영회다.

얼마나 지옥스러운지 상영목록을 한번 볼까나? 에드 우드 감독의 <외계로부터의 9호 계획>은 예의상 틀었다고 치자. 북한의 <장군의 아들>이라는, 국군들이 대사는 없고 죽는 연기만 한다는 종북좌파 액션영화 <명령27호>. 실베스터 스탤론이 소싯적에 헬스클럽 비용을 벌기 위해 속아서 찍었다는 포르노 <이탤리언 스탤리언>. <스타워즈> 푸티지 무단도용과 <인디아나 존스> 스코어 무단도용, 그리고 분량이 모자랄 때면 나와버리는 긴 내레이션으로 점철된 <터키 스타워즈>. 현재 미국에서 폭풍적 컬트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오스카 와일드 뺨치는 절대에고의 토미 웨소 감독의 <더 룸>. 필름을 다 써야지 왜 남기남? 외치시며 모든 자투리 필름까지 알뜰살뜰 찍어대신 남기남 감독님의 불후의 명작 <맹구와 북두신검>까지, 상영목록은 대한민국 그 어떤 상영회보다 괴기하기 그지없다.

왜 이런 요망한 상영회가 아름다운 여성 대통령의 시대에 자행되고 있는 것일까? 이 상영회를 기획하고, 프로그램하고, 운영하고,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시네마지옥 총무 권용만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뷰티와 테크놀로지, 그리고 캐피털리즘의 판타지가 난무하는 세상이 따분해서, 그런 나약해진 나 자신을 질책하듯 고통주는 시네마를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더 큰 고통을 갈구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이런 고통, 나만 당할 수 없으니 다 같이 당해보자는 물귀신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물귀신의 한을 알게 되고, 빙의에 중독이 되었는지, 그리고 또 함께 죽자는 동지들에게 중독이 되었는지, 편한 마음으로 고통을 나누고 있답니다. 아니, 고통이라기보다는… 엑스터시?” 그렇다. <아바타>빠에겐 고통일 수 있겠지만, 물귀신의 한을 알아가는, 망한 영화의 한을 알아가는 구도자 권용만씨에겐 고통은 일종의 쾌감이다(그래서일까, 권용만씨는 또한 ‘밤섬해적단’의 서퍼링 드러밍으로도 유명하다고).

각설하고, 그가 추천하는 지난 상영작과 4월13일 상영예정작을 살펴보며 지옥의 고통을 가늠해보자(지면 한계로 더 많은 영화를 소개하지 못하는 게 한이로다).

<마이애미 커넥션>

List of Inferno

1. <마이애미 커넥션>. 1988년. 리처드 박/Y. K. 김 감독. 시네마지옥 6회 상영작

1988년, 재미동포 리처드 박과 Y. K. 김이 사비를 털어 만든 닌자-로큰롤-갱-태권도 액션무비. 개봉 당시 엄청난 혹평, 아니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갔던, 그러나 25년이 지난 2012년 재발견되어 블루레이가 발매되고, 지금도 미국 어딘가의 심야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컬트클래식이 된 바로 그 작품.

이름부터 오리엔탈스러운 드래곤 싸운드라는 밴드 멤버들이, 홍대 인디신도 아닌데, 지역 갱들과 음악적인 견해 차이로 몸싸움이 붙고, 지역 갱들을 비호하는 일본 닌자들과 사투를 벌인다는, 게다가 밴드의 여성 보컬은 갱두목의 여동생인데 별다른 역할을 안 하고, 닌자들은 낮에는 폭주뜨다가 밤만 되면 닌자로 변신하는,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영화다. 사비로 영화 찍으면 안 된다는 절대교훈을 시사하듯, 제작자와 감독이 모두 영화에 출연해 전라도 사투리가 섞인 콩글리시로 겨우겨우 대사를 해내고 있으며, 아직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이전인 1980년대이기에 35mm필름으로 찍힌 뻥조명의 뻔뻔함과 빈번한 포커스아웃, 아름답고 싶었지만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무술안무, 액션 숏인데 트랙이나 줌을 철저히 배제한 돈 없는 아니 의욕 없는 촬영, 그렇지만 지루할 때쯤 터져주는 드래곤 싸운드의 화끈한 스테이지- <Against the Ninja>!- 가 이 영화의 볼거리일 것이다.

하나 가장 큰 스펙터클은 태권도다. Y. K. 김의 태권도 유단자다운 화려한 춘리(!) 발차기, “태권도는 주먹과 발로 하는 게 아니야. 심장으로 하는 거지” 같은 손발 오그라드는 대사들, 그리고 서사와 상관없이 느닷없이 등장하는 5분가량의 태권도 대련 장면은, 이 영화가 태권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정말이지 드래곤 싸운드 스테이지에서 도복을 입고 이단옆차기를 하던 Y. K. 김과 이를 보며 꼬부랑 발음으로 “태꾸언! 태꾸언!”을 외치는 외국 관중을 보며 어찌나 울컥하던지. 대한민쿡 만쉐 퍽킹 예아.

2. <데스레이스2000>. 1975년. 폴 바텔 감독. 이번 4월13일 시네마지옥 상영예정작

시네마지옥도 가끔 명작 B무비를 상영한다. <데스레이스2000>은 로저 코먼 사단의 1970년대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 중 가장 웰메이드한 영화라 할 수 있는데, 배우로 더 유명한 폴 바텔 감독, <양들의 침묵>으로 유명한 닥 후지모토 촬영감독, <킬 빌>의 빌로 유명한 데이비드 캐러딘 등 훗날 뜰 스타 스탭들의 초기 에너지를 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역작이다.

내용은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에 걸맞게 어디선가 들어본 미래 ‘잔혹’스포츠 이야기로, 엽기적이게도 자동차 경주에서 사람을 치면 점수가 더 올라간다는 설정인데, 촌철살인의 현실비판적 그림들이 연출된다. 이를테면 유명한 사람을 치면 점수가 더 높다든지, 아예 실버타운에선 노인들을 도로에 내놔서 안락사시킨다든지, 아예 나중에는 경주자들끼리 서로 죽여서 점수를 딴다든지 하는 식이다.

주인공 마스크맨이 반란군 여인을 운전보조로 태우면서 플롯은 점점 더 정치적으로 꼬여가는데, 막판에는 대회의 주체이자 미국 대통령을 치어죽이면서(앗, 스포일러 죄송) 마스크맨이 대통령으로 취임한다는 초현실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심지어는 애국적이기까지 한 주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무엇보다 영화의 불가사의한 매력은 닥 후지모토가 담아내는 디스토피아적 풍경인데, <매드 맥스>도 분명히 참조했을 만한 광활한 고속도로와 스산한 사막, 그리 다양하지도 현란하지도 않은 앵글에서 뿜어져나오는 미친 스피드감과 간헐적으로 보이는 미래도시의 컬러풀한 색조감까지, 로저 코먼이 직접 감독했으면 못 이루었을 거대한 SF의 신기원이 그야말로 질주하고 있는 영화다.

시네마지옥 상영회 포스터

Outro

자, <씨네21>을 읽는 그대여. 수꼴이 있으면 좌좀이 있듯이, 문빠가 있으면 안빠가 있듯이, 아 이건 아닌가, 어쨌든 천국이 있으면 지옥이 있다. 천국만 있으면 그게 지옥이고, 지옥만 있으면 그게 천국이다. 제임스 카메론도 에드 우드를 봤으며, 에드 우드도 그리피스를 봤다. 뭔 소리냐고? 헛소리다. 시네마지옥의 고통에 벌써부터 즐거워져서 나오는 헛소리다. <아바타>에선 느낄 수 없는 고통과 쾌락의 희귀한 앙상블을, 지옥에서 느껴보시라. 시네마지옥의 모토처럼, 시네마를 기대했다면 지옥을 보게 될 것이고, 지옥을 기대했다면 시네마를 보게 될 것이다. facebook.com/cinemazi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