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01. 작가
역광을 받은 5m 높이의 불상은 거뭇하고 위압적인 쇳덩이에 불과하다. 오히려 불상 주위를 지나가는 예광탄의 빨간 불빛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박격포탄에 불상 목이 부러지며 눈앞으로 떨어질 때 비로소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부처님 얼굴이 보인다. 웃는 얼굴에 깔려죽을 판이다.
70대 중반을 오락가락하는 임 노인이 놀라 눈을 뜬다. 그냥 죽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불행히도 꿈이었다. 노인은 미련을 털듯 이불을 걷어낸다.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가 없는 앙상한 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을 끝내고 새로 쓸 시나리오 줄거리를 잡겠다고 자판을 토닥이다 멈춘다. 시나리오작가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길을 잘못 들어섰다. 늦게라도 깨달았으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할 텐데 어디로 가야 할지 답이 없다. 평생 꿈이 한량이었으니 매 작품 치열한 생존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현실이 버겁다. 어느 삶이라고 무겁지 않겠냐마는 나이가 드니 엄살만 늘어난다.
“작가란 말이에요.”
드라마 <추노> 때문에 만난 백발 성성한 방송국 드라마 국장이 운을 뗀다. “지을 작(作), 집 가(家)를 쓰죠. ‘家’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는 직업은 정말 대단한 거예요.” 일가를 이루는 사람, 즉 자기만이 가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가’라는 호칭을 달 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못난 글을 써도 작가라 불리지만, 아무리 대단한 연기를 해도 연기자이지 ‘연기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주적 특종을 잡았다고 해도 기자일 뿐이지 ‘기가’는 아니다. 둘 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서 이룩한 결과이기 때문이란다.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직업, 그것이 작가다. 그분의 말을 듣는 동안 작가라는 직업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저는 그냥 작자(作者)라고 불러주시면 안 돼요? ‘작자미상’ 그런 것도 있잖아요.” 그 뒤로 한동안 ‘천 작자’라 불러주셨다. 귀가 조금 편안해졌다.
작가라는 호칭이 아직도 불편한 이유는 열정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듀서를 하겠다고 몇몇 작가와 일을 하다가 더이상 작가료를 지급할 수 없는 가난뱅이가 되었다. 진행하던 작품들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외상으로 글을 받을 만큼의 신용도는 없었다. 별수 없이 혼자 시나리오를 끝내야 했다. 쓰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 써야만 하는 상황에 몰려 작법 공부도 하지 못한 채 작가가 되었다. 억지로 엔딩 신을 마치고 투자를 받으러 다닐 때는 미천한 밑천이 들통나기도 했다. “글쓰는 거 공부 안 했죠? 못 배운 티가 나네요.” 티가 많이 나냐고 물어봤다. 약간 난다는 대답을 들었다. 많이 안 나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몹쓸 긍정이 글쓰기를 계속하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흘러흘러 여기까지 와버렸다. 돌아가자니 너무 오래 걸어왔고 계속 가자니 끝이 뻔한 아득함, 밥자리 술자리마다 넘치는 흔한 엄살이다.
간혹 글을 쓰겠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간단한 산수 이야기를 한다. 우리나라 영화 제작사가 대충 3천개 정도 될 거예요. 제작사마다 최소 시나리오 하나 정도는 있다 치고 한해 제작되는 영화는 계산하기 좋게 100편 정도로 잡아보죠. 한편의 시나리오가 영화로 제작되기까지는 최하 30 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해요. 대통령 선거 때도 경쟁률이 10 대 1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더 쉽게 얘기하자면 전국에서 100등 안에 들어야 한다는 거죠.
1등도 아니고 겨우 100등 정도야, 대부분 작가 지망생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작품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시나리오작가에게는 전관예우가 없다. 흥행작을 했다는 이유로 가산점을 주지 않는다. 한 작품이 성공했다고 쓰는 작품마다 영화로 제작되는 작가는 한명도 없다. ‘유명작가와 무명감독’보다는 ‘유명감독에 무명작가’ 조합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걸 보면 경력 인정도 안 되는 직업이다. 거절과 실패와 모욕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새로운 글을 쓸 때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이 글이 과연 영화가 될 수 있을까.’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항상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잘 쓰면 되잖아요.” 믿을 만한 답변이다. 하긴 불안과 싸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온 사회가 불안을 조장하며 보험을 팔고 교육을 팔고 안보를 팔고, 그것들을 사다사다 지친 사람에게 여행과 취미와 감성을 판다. 팍팍한 세상에 영화 하나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어쩌면 시나리오작가는 참 좋은 직업이다. 그렇게 불안을 위안으로 덮다보면 이 길로 들어선 것이 후회할 만한 일은 아닌 듯 보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엄살을 부리고 있지?
이제는 솔직히 인정할 때다. 나는 지금 삶의 가치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글이 안 써져서 잡생각을 하는 중이다. 보통 작가들은 글이 생각대로 안 풀릴 때 이런 종류의 투정을 부린다. 글이 살아 움직일 때는 작가도 덩달아 살아나 자기가 쓴 글에 울고 웃으며 현실과 단절되어간다. 캐릭터에 빙의되지 않는 한 그 세계를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마음을 다잡고 멈췄던 자판을 다시 투덕인다. 이번에는 꽤 아름다운 작품이 나올 것 같다. 갑자기 자신감이 생긴다.
임 노인은 새벽 첫차 시간이 되기도 전에 읍내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매표 창구에 천원짜리 몇장과 한줌의 동전을 밀어넣는다. 전 재산을 도박판에 밀어넣는 승부사처럼.
“사이공 한장.”
판매원은 늘 겪는 일처럼 아무 차표에 ‘사이공’이라고 써서 내준다. 임 노인은 표를 확인하고는 기분 좋게 승차장으로 나간다. 오늘은 베트남에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제대할 때 가져왔던 더플백에 짐이 가득 들어 있다. 그 안에 보물지도가 들어 있는 것은 임 노인만 알고 있다.
쓰다 말고 처음부터 읽어본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현재와 베트남전을 넘나드는 구성이 재미가 있을까. 전쟁영화를 멜로와 코미디로 융합하는 게 가능할까. 예산도 많이 들 텐데 따뜻한 영화보다는 화끈한 영화가 어울리지 않을까. 그나저나 창조경제에 부응하는 주제는 아닌 것 같은데… 모든 것이 얽히기 시작했다. 시나리오작가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길을 잘못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