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일컫는 여러 종류의 말이 있다. X나 Y 같은 알파벳을 사용하기도 하고, ‘88만원 세대’처럼 구체적인 액수를 쓰기도 하고, ‘인터넷 세대’처럼 새로운 문물의 이름을 빌려오기도 한다. 참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세대가 함께 살고 있는 셈이다. ‘너는 무슨 세대니?’라고 나에게 (아무도 안 물어봐서 내가 직접) 물어본다면 ‘스니커 제너레이션’(Sneaker Generation)이라 대답할 것이다(이러면서 괜히 새로운 단어 하나 만들어낸다). 나에게 스니커는, 정확히 말해 운동화는, 계급을 나누는 지표였고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이었으며 앞으로도 버리기 힘들 것 같은 라이프 스타일이다.
지금은 나이키며 아디다스며 뉴발란스 같은 신발들을 누구나 신고 다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지방의 소도시에서는 신발이 계급이었다. 나이키나 아디다스를 신지 못하는 아이들은 하얀색 실내화에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로고를 그려넣으며, 뜻하지 않게 미술 실력만 늘어갔다. 내가 그랬다. 나이키 로고의 곡선은 지금도 눈 감고 그릴 수 있다. 아디다스나 프로스펙스나 푸마 역시 로고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신발 회사 덕분에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게 됐는지도 모른다. 무척 감사하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비교적 비싼 신발을 신어볼 수 있었는데, 지금도 그때의 쿠션 감동이 ‘스리쿠션’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으로부터 내 발을 지켜주고야 말겠다는 듯 고무 밑창은 폭신했다. 내 발이 뒤틀리는 걸 막아주겠다는 듯 갑피는 견고했다. 한발 디딜 때마다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고, 운동화 끈만 꽉 묶고 나면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니커 제너레이션’의 우상인 마이클 조던의 전성기가 시작되던 1985년 무렵부터 그의 이름을 딴 신발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우리의 세대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우리는 새로운 운동화와 함께 성장해왔고, 더 나은 기술력으로 중무장한 운동화와 함께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살아왔다.
신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초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형편이 넉넉 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시장에서 운동화를 사주었다. 이름도 없는, 그나마도 외국 브랜드의 디자인을 모방한 운동화였다. 나는 학교에 갈 때마다 그 신발이 부끄러웠다. 밑창도 튼튼하고 신발끈도 하얀 새것이었는데, 어쩐지 계속 부끄러웠다. 신발이 부끄러운 것인데 이상하게 발가락이 간질간질거리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발가락이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형에게 좀더 좋은 신발을 사주었고, 나는 급기야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렸지) 신발이 찢어지면 좋은 신발을 사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신발에다 칼로 흠집을 냈다. 어디엔가 걸려서 찢어진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어머니는 (나의 계략을 눈치챘으면서도) 결국 새 신발을 사주셨다. 더 나은 신발을 사주었는지, 아니면 똑같은 신발을 사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내가 기억하는 것은 신발에다 칼로 흠집을 내고 있는 한 아이의 표정이다. 그건 내 얼굴의 표정이었으니 내가 직접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그 표정이 생각난다. 그 표정을 떠올리며 나는 부끄러워한다.
영화 <천국의 아이들>을 보다가 대성통곡한 것은 그때의 내 표정이 자꾸 생각나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자주 발을 비추는 영화는 처음 보았다. 그렇게 다양한 신발이 등장하는 영화도 처음이었다. 내 마음 뜨끔하라고 계속 발과 신발만 비추는 것 같았다(못된 사람들 같으니라고).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초등학생 알리는 어느 날 엄마의 심부름을 갔다가 금방 수선한 여동생 자라의 신발을 잃어버린다. 하나뿐인 여동생의 신발을 잃어버렸지만 부모님께 말하지는 못한다. 가난하니까 신발 살 여유가 없다. 둘은 교대로 신발을 신기로 한다. 이어달리기 바통을 건네듯 오전 수업이 끝나면 동생이 오빠에게 신발을 건넨다. 내 마음을 찢어놓았던 장면은 오빠의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간 여동생 자라가 부끄러워서 계속 발을 숨길 때였다. 낡고 큰 오빠의 운동화를 숨기기 위해 쭈뼛거리는 자라의 ‘(진정한) 발 연기’가 지금도 선명하다. 이 장면 말고도 가슴 찢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알리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마라톤 3등 상품이 운동화인 것을 보고, 참가하기로 마음먹는다. 여동생에게 신발을 선물하기 위해 열심히 달린 알리는…, 아, 마지막 결과는 스포일러겠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발이 좀 어색하다. 오빠의 신발을 신은 자라처럼 자꾸만 내 발을 감추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신발을 벗는 식당에 들어갈 때마다 조금 쭈뼛거리게 되고, 기차나 버스에서 신발 벗는 아저씨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며, 신발 가게에서 점원이 끈을 묶어줄 때마다 송구스러워서 발가락이 움츠러들며, 큰마음 먹고 가보았던 발 마사지 가게는 평생 다시 가지 않을 생각이다. 왜 그럴까. 왜 자꾸만 발이 부끄러울까.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에는 주인공 로비와 세실리아가 하나의 상황을 다르게 생각하는 대목이 나온다. 세실리아의 집으로 들어서던 로비가 갑자기 신발과 양말을 벗더니 성큼성큼 걷는다. 세실리아는 로비가 자신과 거리를 두기 위해 익살스러운 행동을 한다고 추측했지만, 실상 로비의 이유는 양말에 구멍이 난 데다 냄새도 심하게 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어쩌면 내가 발을 부끄러워하게 된 것은 기억 저편의 어떤 일 때문이 아니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40년 넘게 나와 함께 지내온 신체 중에서 가장 어색한 것은 발이다.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보면 저 발이 과연 내 것인가 싶을 정도로 낯설게 느껴질 때가 많다(어쩌면 큰 키 때문에 뇌와 발가락의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고 막 추측해본다. 하하…).
어릴 때부터 맨발로 지냈다면 지금의 발 부끄러움증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인간에게는 신발이 필요 없다. 에드워드 테너의 <사물의 역습>에는 이런 근거가 여러 개 등장한다. 1980년대 후반 생체역학의 선구자인 R. 맥닐 알렉산더는 인간의 몸이 탄성에너지를 저장했다가 방출하며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힘줄이 반동을 통해 93%의 에너지를 다시 돌려주며, 발바닥 아치가 처음 가해진 힘의 78%를 돌려주는 것을 발견했지만 대부분의 운동화들은 받은 힘 중에서 55~65%만 되돌려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운동화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딛는 바닥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유해물질과 시설물들 때문에 보호장비가 필요해진 것이다.
책에는 또 다른 연구 결과도 있다. 진화된 운동화의 부드러운 쿠션이 오히려 쉽게 균형을 잃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가장 저렴한 신발을 신은 이들보다 가장 비싼 신발을 신은 이들이 달리기에서 부상을 입을 확률이 123%나 더 높으며, 밑창이 부드러울수록 달리기 주자는 땅을 더 세게 디딘다는 것이다. 우리가 발보다 신발을 믿는 순간, 발에는 치명적인 충격이 올 수 있다.
‘스니커 제너레이션’인 나는, 구두보다 운동화가 편하며 격식보다 실리가 중요하다. 어쩔 수 없이 신발을 신어야 한다면 운동화를 신을 수밖에 없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살고 있다. 요즘은 가끔 편한 신발에 대한 불안함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마냥 편한 게 과연 좋은 것일까. 쿠션 속에 발을 감추고 사는 게 나은 것일까. 나는 쿠션을 마냥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드러운 게 나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발보다는 내 발을 더 신뢰하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