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1일 국회에서 ‘영화산업, 상생의 길을 찾다’ 세미나가 열렸다.
모태펀드는 ‘펀드들의 펀드’(Fund of Funds)다. 불특정 다수로부터 모금한 실적 배당형 성격의 투자기금을 펀드라고 하는데, 개별 기업이나 프로젝트에 직접 투자되는 보통의 펀드와 달리 정책 자금으로 조성된 모태펀드는 벤처캐피털이 결성, 운영하는 펀드에 투자된다. 이렇게 출자된 돈은 민간투자재원(창투사,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투자)과 함께 펀드운용사가 투자하는 중소기업(제작사)이나 개별 영화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모태펀드는 2005년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 등 정부 기관 네 군데의 출자를 통해 결성됐다. 2013년 12월까지 지난 8년 동안 문화부, 중소기업진흥공단, 특허청,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등 여러 정부 부처가 1조6216억원 출자를 약정했고, 2006년부터 지난해 12월 말까지 51개 투자조합, 1조204억원 규모의 펀드가 결성됐다. 이중 정부출자분은 총 4042억원. 모태펀드는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영화분야에 1072건(투자건수는 펀드별 중복투자 포함) 6582억원을 투자했다. 한국 영화산업이 2007년부터 시작된 불황기를 극복하고, 최근 2년간 호황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모태펀드 덕분이라는 게 영화계의 평가다.
중소기업을 위한 자금이라는 명분은 어디로
최근 모태펀드를 점검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3월 11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이강후 의원이 주최한 정책 세미나 ‘영화산업, 상생의 길을 찾다’에서다. 이강후 의원은 지난해 10월에 열린 중소기업청(이하 중기청)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공적자금 성격으로 영화산업에 투자한 중소기업투자 모태펀드 덕분에 한국 영화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면서 “하지만 영화분야에 투자된 6582억원 중 70% 정도가 대기업 투자배급사에 집중적으로 투입됐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모태펀드가 중소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을 빌미로 대기업의 배불리기에 사용되지 않도록 면밀히 관리, 감독하는 게 중기청의 역할”이기에 “영화산업의 특성상 중기청의 직접 투자보다는 소관 부처(문화부)에서 모태펀드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덧붙였다.
세미나에서 성균관대 경영학과 문철우 교수와 M&E 산업연구소 김도학 소장이 각각 발제한 내용도 이강후 의원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미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모태펀드가 최근 한국영화 콘텐츠 개발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중기청의 펀드가 대기업 위주로 출자되는 구조는 문제가 있다. 물론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투자 없이는 펀드가 결성되는 게 쉽지 않다. 또 일반 상업영화에 투입되는 수익성 펀드와 독립영화에 투입되는 지원형 펀드의 역할 구분도 필요하다. 모태펀드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를 보완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얘기가 이날 세미나의 주요 논제였다.
불황을 이겨낸 종잣돈인가, 아니면 대기업을 위한 쌈짓돈인가. “양날의 검”이라는 모태펀드를 두고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할 말이 있다. 대기업은 “모태펀드가 대기업에 투입된다고 몰아붙이는 건 모태펀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얘기”라고 말한다. 펀드가 제작사에 투자되는 것이 모태펀드의 기본 구조다. 대기업 투자배급사는 공동투자(제작, 배급도 포함)를 하면서 제작사 대신 투자를 받아온다. 투자자들은 대기업 투자배급사가 공동투자로 참여하는 것을 선호한다. 리스크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투자자가 영화에 투자하기 전에 먼저 살펴보는 건 다음 세 가지다. 첫째, 제작 완성을 보증할 수 있는가. 둘째, 자본 조달이 100% 가능한가. 셋째, 어떻게 개봉할 것인가. 이것은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참여 없이 제작사 혼자의 힘으로는 투자를 받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진위의 한 관계자는 “제작자가 가진 아파트가 완성을 보증할 수 있는 담보가 될 순 없잖나. 반면, 대기업 투자배급사가 공동제작의 파트너로 합류하면 그들의 다음 라인업이 완성 보증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 제작자는 “제작사들이 수익 분배와 정산이 불투명하다는 건 과거에나 나왔던 얘기다. 산업화가 되면서 제작사들 역시 체질 개선을 했다”고 반박했다.
성과 중심주의가 낳은 딜레마, 구조적 보완 필요
모태펀드가 가진 딜레마가 여기서 생겨난다. 모태펀드가 정책 자금인 까닭에 정부는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중소기업 지원이 목적인 펀드라 어쩔 수 없이 대기업 투자배급사에 대한 규제를 하나씩 늘릴 수밖에 없다. 규제가 엄격해지자 모태펀드 결성 초반에는 대기업들이 모태펀드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덩달아 투자자들도 영화 투자에서 손을 떼자 펀드 결성이 어려워졌다. 그러자 정부는 다시 규제를 풀었다. 이런 식으로 지난 9년 동안 모태펀드는 규제를 추가했다가 풀기를 반복해왔다. 그 과정에서 중간급 규모의 펀드와 글로벌펀드 등 다양한 펀드가 추가되면서 펀드의 종류가 많아졌다.
현재 구조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대기업 투자배급사와 모태펀드를 운용하는 창투사간에 이루어지는 이면 계약도 대기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특정 영화를 제작사와 대기업 투자배급사가 공동제작하기로 했다고 치자. 투자가 결정되면 모태펀드를 운용하는 창투사가 제작사에 제작비를 보낸다. 제작사는 그 돈을 받자마자 곧바로 투자배급사에 계좌이체한다. 창투사와 제작사간의 투자 계약은 ‘중소기업 지원’이라는 명목에 불과한 것이며, 투자 심사 과정에서 이미 이루어진 창투사와 대기업 투자배급사간의 이면 계약이 ‘진짜’ 투자 계약인 것이다. 대기업이 없으면 투자를 받기 힘든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아이러니한 관행이다.
대기업은 그렇다치더라도 몇개를 제외한 대부분의 제작사들이 이면 계약이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얘길 꺼내지 않고 있다. 한국영화산업전략센터 최현용 소장은 “이면 계약은 불법이다. 제작사에 들어가야 할 돈이 대기업 투자배급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면 계약이 잘못된 건지 알면서도 제작사와 대기업은 모태펀드의 필요성때문에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와쳐 윤창업 대표는 “모태펀드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기댈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며 “하지만 제작자로서 모태펀드가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모태펀드는 모태펀드대로 운용하되, 다양한 금융 상품을 통해 제작비를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최현용 소장은 모태펀드를 본질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면계약은 투자 관리(대기업)와 제작 관리(제작사)가 분리된 한국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관행이다. 최근 한국영화제작가협회가 리틀빅픽쳐스라는 대안배급사를 만든 것도 이런 관행을 돌파하기 위한 의도”라고 설명했다.
대기업도, 제작사도 모태펀드가 한국 영화산업에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모태펀드가 없었더라면 그 많은 라인업을 꾸릴 수 없었을 것이다. 모태펀드 덕분에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의 돈으로 많은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모태펀드의 구조적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아직은 없다. 모태펀드가 모두의 종잣돈이 될지, 누군가의 쌈짓돈이 될지, 영화계와 정부의 노력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