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볼피의 <클링조르를 찾아서>는 범죄자를 뒤쫓는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치 전범을 단죄하는 뉘른베르크 법정. 피고인 자리에 선 독일군 최고지휘관들은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 뿐 결코 불명예스러운 일이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제국총사령관 겸 공군총사령관으로 히틀러에 이어 나치 정권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은 유대인 죄수를 산소통 없이 9000m 상공에 데려가서 몇분 만에 사망하는지 관찰한 인체실험을 지시했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내가 신경쓸 만한 일이 아니었다”라고 혐의를 부인한다. 그 과정에서 검찰쪽 증인으로 나온 독일국방과학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나치의 모든 연구 작업은 히틀러의 ‘학술고문’에게 승인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비인간적인 인체실험을 승인한 이 학술고문은 클링조르라는 가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소설은 물리학자 출신의 한 미군 장교가 클링조르의 정체를 추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얼핏 한 조각의 단서를 토대로 범인을 찾는 평범한 스토리 같지만, 이 소설은 두 가지 점에서 대단히 흥미를 끄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선 주요한 용의자들과 그들의 혐의를 밝히는 데 도움을 주는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과학자들이라는 점이다. 게임이론을 만든 폰 노이만, 불완전성의 정리로 유명한 쿠르트 괴델을 시작으로 다비드 힐베르트, 닐스 보어, 막스 플랑크, 에르빈 슈뢰딩거 등 수학과 물리학의 거장들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시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놀랍게도 나치에 협력한 혐의가 가장 짙은 것으로 묘사되고, 고등연구소 시절의 아인슈타인도 빠지지 않는다. 20세기 초•중반 물리학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던 위대한 지성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색은 고전적 인과성의 의미를 무력화하는 불확정성의 원리와, 우리가 내리는 윤리적인 결정이 가장 저열한 것부터 가장 고귀한 것에 이르기까지 단지 우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평행우주론 등 양자역학을 토대로 한 현대물리학의 우주관(혹은 우리 문외한들이 현대물리학의 우주관이라고 오해하는 것)이 소설 속에 교묘하게 녹아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천재들이 원자폭탄 개발을 놓고 독일과 연합군 양쪽에 서서 맹목적으로 경쟁하다가, 그 성공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누가 빨리 개발했는지에 따라 각기 좌절하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타락한 천사 루시퍼는 지옥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우연도 지배한다고 한다”는 책 속의 구절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비이성이라는 절대적 공포와 마주치는” 느낌을 맛보게 하는 책. 양자역학이 소설의 소재로 성공적으로 사용된 또 다른 예를 보고 싶은 분들께는 율리 체의 <형사 실프와 평행우주의 인생들>, 그리고 A. C. 바이스베커의 <코스믹 반디토스>를 함께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