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은 야만의 밤이었다. 경주 리조트 붕괴사건. 10명 사망에 다친 사람도 100명이 넘는다. 19살 신입생들이 캠퍼스의 봄도 못 보고 비명에 갔다. 눈밭 위에 구르는 운동화 사진, 심장이 저렸다. 무너진 지붕 밑에서 살려달라는 외침과 비명이 들린다고 했다. 어디 나뿐이었겠는가, 사망자가 더 늘지 말기를 기도하며 속보 채널에 귀를 기울였던 게.
하지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공중파 3사에서는 그 비극의 순간에 올림픽을 중계하고 있었다. 피겨 선수들이 빙글빙글 춤을 추고, 중계진이 들뜬 목소리로 희희낙락했다. 그리고 화면 하단의 속보 자막으로 사망자 숫자가 심드렁하게 지나갔다. 올림픽 기간 “김연아는 대한민국이다”라는 광고 카피를 주야장천 틀어대던 방송국들, 저기 경주에서 생사를 오갔던 어린 학생들은 대한민국이 아니었나 보다. 저들의 목숨은 소치의 빙판보다 덜 반짝거리나 보다.
비극적이게도, 어젯밤 저 공중파 TV야말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한국형 대형참사의 원인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다. 스펙터클의 과잉은 실제의 삶을 은폐한다. 한국의 시민들은 대형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안전불감증’이란 말을 감흥 없이 지루하게 늘어놓지만 사실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관심이 없다. 사회적 안전망이란 시스템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 삶의 상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한국 자본주의가 요청하는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저 위험을 감수하는 체념의 주체가 되어버렸다.
비록 도처마다 지뢰밭이고, 도처마다 화약고라고 해도 자기 자신에게 참사의 불똥이 직접 튀지 않는다면 현재의 위험은 감수할 만한 것이라는 체념과 순응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안전한 공동체의 삶’이란 성공과 경쟁의 스펙터클을 위해 유예될 수 있는 잉여로 치부된 지 오래다. 비탈지고 가파른 성공 지상주의의 삶에서 안전사고란 그저 운 없는 복불복일 뿐이다. 아무리 백화점과 다리가 무너지고, 지하철이 불타오르고, 다중이용시설에서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억울하게 비명횡사를 당해도, 그 흔한 안전 관리 실태에 대한 기준이 없다.
대형참사가 복불복으로 여겨지는 한국에서 산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압축적 근대화가 낳은 이 부실의 위험도와 대기업 날림공사에 대한 제약과 감시보다 희생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의 저 음란한 수사들은 얼마나 구태의연한가.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고 있는데도, 우아하게 피겨스케이팅을 틀어대는 공중파의 잔인함은 얼마나 숭고한가. 속보 자막으로 희생자 수를 헤아리며 나는 해당되지 않는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우리는 또 얼마나 늠름한가.
경주 리조트가 무너진 오늘은 대구지하철참사 11주기가 되는 날이라고 한다. 우리의 체념이 지속되는 한 참사는 꾸준히 지속될 뿐이다. 우리가 다음 디딜 곳도 지뢰밭이다. 그저 19살 꽃다운 나이에 죽은 학생들 목숨이 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