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스탭들과 쪼그려앉아 찬합을 쌀 보자기 디자인까지 손수 고르는 강제규 감독(맨 오른 쪽). 사소한 소품에까지 강제규 감독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 여러 후보들 가운데 최종적으로 낙점된 디자인은 “부드러워 보이는” 은은한 핑크빛 꽃무늬 보자기다.
만류하는 통일부 직원들을 뿌리치는 연희(문채원, 가운데). 남편에게 “숭어국이랑 밥 좀 먹이게” 북으로 자신을 보내달라고 울부짖고 있다. 문채원이 들고 있는 찬합은 잠시 뒤 바닥에 내팽개쳐질 운명이다.
연희(문채원)는 정성스레 싼 도시락을 들고 남편을 만나러 가지만 이산가족 상봉은 갑작스레 취소된다. 연희는 이를 믿을 수 없어 버스를 강제로 멈추고 검문소 앞 군인들에게로 달려간다. 문채원과 손숙이 번갈아 연기한 장면이다.
이번엔 만류하는 통일부 직원들을 뿌리치는 노인 연희(손숙, 가운데)다. 손숙은 강제규 감독에게 “연희가 바닥에 쓰러져보는 건 어떻겠냐”며 즉석에서 새로운 연출을 제안하기도 했다.
2년 만의 연출이어서인지 강제규 감독은 내내 에너지가 넘쳤다. “채원, 약간 다른 쪽으로도 시선을 줘볼래?” 컷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연기를 확인하러 오는 문채원에게도 디렉션을 잊지 않는다. “자 자, 오후 되면 못 찍는다! 시간 없으니까 서두르자!” 문채원이 카메라 앞으로 돌아가자 강제규 감독은 모든 스탭을 격려하며 다시 힘차게 액션을 외친다.
임진각 근처 도로에서 촬영 중이라던 <민우씨 오는 날>의 촬영팀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박창주 피디에게 전화해보니 이동한 지 한참이란다. 촬영팀이 대기 중이라는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으로 달려갔는데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추운 날씨에 이게 웬 술래잡기란 말인가. 통일대교까지 쫓아가서야 간신히 촬영팀의 꼬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겨우 만난 박창주 피디가 술래잡기의 이유를 알려줬다. “이틀로 예정돼 있던 민통선 검문소 앞 촬영 허가가 하루로 줄었다. 촬영 허가는 하루뿐인데 찍어야 할 분량은 두배다. 심지어 낮 장면만 남아 있는 상태라 해가 지기 전까지 모든 촬영을 완료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그 어떤 현장보다도 스탭들의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다. 두꺼운 패딩을 껴입은 스탭들과 달리 강제규 감독은 춥지도 않은지 얇은 점퍼만 걸쳤다. 현장에서 그가 얼마나 뛰어다니는지 알 만하다. 과연 주인 잃은 모니터 앞 감독 의자엔 종일 이런저런 짐들만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버스 장면을 찍느라 노인 보조출연자들이 대거 투입됐다. 스탭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중에도 노인 배우들은 절대 여유를 잃지 않았다. 할머니 배우들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스탭을 재촉하는 통에 한 스탭이 단체로 할머니 배우들을 차에 태워 임진각 화장실까지 모셔야 했다. 사라진 할머니 배우들을 찾던 또 다른 스탭은 “바쁜 와중에 어디로 자꾸 사라지시냐”며 투덜댔다. 할아버지 배우들은 촬영을 기다리며 심심했는지 스탭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곤 했다. “어이, 사탕 같은 거 있으면 하나 줘봐.”
주연배우인 문채원과 손숙은 쌍둥이처럼 똑같은 차림으로 나타났다. 6•25전쟁 때 헤어진 남편 민우(고수)를 만나러 온 연희의 과거와 현재를 각각 연기하기 때문이다. 실제 모습은 노인이지만 연희의 기억은 젊었을 때에 멈춘 탓에 문채원과 손숙은 2인1역을 연기한다. 손숙의 촬영이 먼저였다. 버스 안에서 설레는 얼굴로 상봉을 기다리는 장면과 갑작스레 이산가족 상봉이 취소돼 절망하는 장면을 촬영한다. 손숙은 강제규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이런저런 제안을 했다. “내가 여기서 주저앉아볼까?” 온몸을 던진 손숙의 열연이 지나간 자리에 배우만 바꿔 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감독의 액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문채원은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연희의 좌절을 연기해냈다. 떨어뜨린 찬합에서 흐르는 김칫국물이 묻는 줄도 모른 채 문채원 역시 차가운 길바닥에 온몸으로 쓰러졌다. 우여곡절 끝에 해가 지기 직전 간신히 촬영을 마쳤다. 영화는 제작을 지원한 홍콩국제영화제가 개막하는 3월 말 이후 공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