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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엔진은 시한폭탄

자본 독점, 초국적 콘텐츠, 전근대적 시스템이 만든 한류의 지속 가능성과 딜레마

소녀시대

한류가 동아시아 대중문화 시장에서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부상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부귀영화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우리 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원천 콘텐츠를 계속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고, 무엇보다도 산업적으로 투명하지 않은 한국의 연예 제작 시스템이 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한류가 동아시아의 특별한 문화 흐름으로 부상한 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한류는 여전히 건재하다. 한류는 드라마로 시작해 영화로, 아이돌 팝으로, 그리고 게임, 비보이, 웹툰으로 진화하면서 그 문화적 포자들을 전세계에 뿌리고 있다. 한류가 초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에서 주목받는 특별한 문화 콘텐츠로 각광받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한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의 원동력은 무엇이고, 그 안에 어떤 불편한 진실은 없는가? 그리고 한류의 미래는 영원할까? 오늘 이 이야기를 해보자.

제3의 동아시아 대중문화

문화의 유행 형식으로 한류는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서 세 번째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이다. 가장 먼저 지배적인 유행 형식으로 등장한 것은 일본의 J-POP(제이팝)이다. J-POP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대중음악, 패션으로 1980년대까지 아시아 대중문화를 지배했다. 대만이 가장 열광했고,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J-POP 팬덤 현상에 합류했다. 일본 대중문화가 허용되지 않았던 한국에서도 수많은 일본산 TV 만화영화, 패션잡지, 그리고 엑스 재팬(X JAPAN)과 같은 일본식 비주얼 록밴드에 꽤나 열광했다. 1980년대 말부터 J-POP의 지배적 위치를 대신한 것이 홍콩의 CANTO-POP(칸토팝)이다. 장학우, 곽부성, 여명, 유덕화라는 홍콩 4대 천왕은 중화권 국가들뿐 아니라 한국, 일본에까지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홍콩의 대중문화는 더이상 아시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중국 본토의 강력한 문화 규제를 우려한 홍콩의 연예산업계가 투자를 줄이고, 일부는 미국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중국의 개혁개방 바람과 홍콩의 중국 반환을 기점으로 한국의 대중문화는 정서적 반감이 많았던 J-POP을 대신해 중화권 국가들의 빈약한 문화 콘텐츠 시장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한류는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클론, H.O.T 같은 한국 음악그룹들은 중화권 국가에서는 일찍이 경험하기 어려웠던 화려하고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사랑이 뭐길래> <별은 내 가슴에> <의가형제>와 같은 초기 한류 드라마에 대해 중화권 국가들은 적당히 세련되면서도 적당히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의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한류 문화자본의 축적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SM, YG, JYP의 완벽한 아이돌 시스템

한류의 지속 가능성의 내적인 요인은 바로 초기 문화자본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탄탄한 연예 제작 시스템에 있다. 한때 미국의 뉴키즈 온 더 블록의 아이돌 제작 시스템을 따라했던 SM엔터테인먼트는 이제 전세계에서 아이돌 그룹을 가장 잘 만드는 기획사가 되었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 제작 시스템은 전세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연간 수십만명의 아이돌 지망생 중에서 원석을 골라내고, 이들을 짧게는 2∼3년, 길게는 4∼5년의 합숙훈련을 통해 완벽한 아이돌 운명공동체를 만들어낸다. 2012년에 데뷔한 아이돌 그룹들은 총 84팀이나 될 정도로 양적인 물량공세도 세계 최고다. SM뿐 아니라 YG엔터테인먼트와 JYP엔터테인먼트의 ‘기획-훈련-제작-매니지먼트’의 완벽한 ‘인 하우스’(in-house) 시스템은 아이돌 팝과 그룹의 제작에 관한 한 독보적인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장기합숙, 노예계약도 불사하고 24시간 감정노동마저 기쁜 마음으로 감내하는 아이돌들의 자기헌신이 추가되어, 한국의 K-POP 제작 시스템은 강력한 정신력마저 보유하고 있다. SM의 지난해 매출액은 2700억원에 주식시가총액이 현재 1조원을 바라보고 있다. YG엔터테인먼트도 지난해 매출 1200억원에 7천억원에 육박하는 시가총액을 보유하고 있다. 한류의 또 다른 한축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산업 역시 지난해 한국영화 2억명 관객을 동원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자본 축적을 이루어내고 있다. 최고의 문화 콘텐츠 산업인 게임산업은 지난해 게임중독법 논란에도 불구하고 10조원의 매출에 3조원의 수출을 기록했다.

한류 문화 콘텐츠 시장에 엘리트 인재들이 대거 유입되고, 국가주도형 문화 콘텐츠 육성정책이 지속되며, 나름 탄탄한 문화자본을 구축하고 있는 한류는 당분간 쉽게 자취를 감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류를 대체할 만한 동아시아 제4의 문화 콘텐츠의 흐름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새롭게 눈여겨볼 점이 있다. 그것은 한류의 지속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한류를 아주 특별하게 지탱하게 만드는 그 내적인 구조의 한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싸이의 <강남스타일> 공연.

한국적 문화 콘텐츠 제작의 특수성

한류의 지속 가능성은 한국적 문화 콘텐츠 제작의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강력한 문화자본의 독점 체제, 글로벌한 문화적 참고체계, 그리고 다소 전근대적인 연예 제작 문화 환경이 바로 한류의 지속 가능성의 내적 요인의 특수성이다. 한국의 영화산업과 방송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대기업 자본과 연계되어 있는 CJ E&M에 의해 독점화되고 있다. 한국의 아이돌 팝 시장은 전체 대중음악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그중 3대 아이돌 연예 제작사가 차지하는 독점력은 말할 것도 없다. 게임산업 역시 제작-유통-자본에 있어 막강 파워를 가지고 있는 넥슨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리고 한류가 제작하는 문화 콘텐츠들은 모두 초국적이다. 한류의 문화 콘텐츠 안에는 고유하게 한국적이라고 여길 만한 것들이 거의 없다. 제작 초기부터 먹고살기 위해 초국적인 콘텐츠를 제작한 탓이다. 여기에 기본적인 노동기준조차 없는 한류 콘텐츠 제작 일선의 열악한 작업 환경은 역설적이게도 한류의 지속 가능성의 불가피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한류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대기업의 문화자본이 더 독점화되고, 원천 콘텐츠의 초국적성이 더 강화되고, 콘텐츠의 제작 환경이 더 열악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시 역설적으로 한류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해소되어야 할 과제들이다. 한류의 지속 가능성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류의 지속 가능성의 현실적인 요인들을 더 진일보한 지속 가능성을 위해 제거해야 하는 이 딜레마는 결국 한류 콘텐츠의 종다양성 확보와 투명하고 공정한 제작 환경의 복원을 통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