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맛>이라는 만화책 제목을 들은 사람은 대부분 고력양, 즉 동물 염소(goat)를 떠올린다. 뭐야, 흑염소 고아 먹는 이야기인가, 흑염소 맛에 중독된 사람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흑염소를 먹어치우다가 결국 서로 싸우며 파멸하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이 염소는 그 염소가 아니라 수영장을 소독할 때 쓰는 염소다. “염소의 맛이라니, 웩!!” 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겠지만 세상 어떤 물질에든 맛은 있게 마련이다. 나도 염소의 맛을 좋아하는 편이다. 매캐한 냄새를 좋아하는 편이다. <염소의 맛> 주인공은 한발 더 나아간다. 수영할 때 코마개가 있으면 좋다는 충고에 “아, 그건 괜찮아요. 나는 애들 오줌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들 각질 맛도 나름 좋아해서”라고 답한다. 이런 변태 청년을 보았나. 그런데 애들 오줌이나 각질의 맛이란 게 어떤 건가 궁금하긴 하다. 내가 이미 수영장에서 맛보고 있는, 바로 그 맛일까? 수영장 안에서는 다른 맛들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염소의 맛이 워낙 강해서다.
수영의 매력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박태환이나 펠프스의 동영상을 권하는 게 빠를 수도 있겠지만) <염소의 맛>을 권한다. 바스티앙 비베스의 투명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물속에서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염소의 맛과 냄새가 느껴지고, 말이 들리지 않고, 막막하고, 투명하고, 때로는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주인공이 수영장 끝에서 끝까지 잠영을 하는 대목에서는 보는 사람이 다 숨이 막힐 지경이다.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뱉어낼 때 그제야 나도 숨쉬게 된다. 별다른 내용도 없고, 대사도 많지 않은데, <염소의 맛>을 읽고 나면 수영을 하고 난 것 같다. 만화에 이런 대사가 있다. “이런 거 생각해봤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못할 거 같은 거….” 그런 게 있었을까. 그런 게 앞으로 있을까. 그런 게 없어도 괜찮은 걸까. <염소의 맛>은 아릿한 한 시절의 맛이나 냄새 같고, 그 시절로부터 멀어지며 유영하는 우리의 맛 같고, 우리의 모습 같다.
잠영을 하다 수면 위를 올려다보는 <염소의 맛>의 명장면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바다에 빠진 파이가 물밑에서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극장에서 3D 안경을 쓰고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다가 이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짧은 탄식을 내질렀다. 내 눈앞에 물속의 파이가 있고, 저 멀리 침몰하는 배가 있었다. 나는 파이보다 더 깊은 물속에서 모든 걸 잃고 마는 파이를 보았다. 두팔과 다리를 늘어뜨리고 계속 가라앉는,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파이를 보았다. 침몰하는 거대한 배는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불빛들이 가라앉고 있었고 파이는 그걸 보기만 했다. 자꾸만 내게로 가까워지는 파이를, 나는 떠밀고 싶었다. 떠밀어서 수면 위로 밀어올리고 싶었다. 모든 걸 잃었지만 그래도 살아내라고, 죽지 말라고, 빨리 수영을 시작해서 바다 위로 올라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영화 역사에서 3D영화라는 게 반드시 있어야 했다면 이 장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과장해서 말하고 싶을 정도로 모든 게 눈앞에서 생생하고 아름답고 처참했다. 한참 뒤에야 파이는 팔을 젓고 발차기를 하며 물 위로 헤엄쳐갔다. 아름다운 수영 장면이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는 아름다운 수영 장면이 하나 더 나온다. 바다에서 악전고투하던 파이가 신비의 섬에 도착해서 평영을 하는 장면이 있다. 바다에서의 수영은 수많은 위험요소가 있지만 담수에서의 수영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우리가 흔히 ‘개구리헤엄’이라고 부르는 평영을 그렇게 아름답게 구사하는 장면을 전에는 보지 못했다.
수영 선생님에게 수영을 배울 때 남녀 차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상급자로 올라가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수영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의 예가 그렇다는 것인데, 남자들은 힘이 좋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자유영이라 부르는) 크롤영과 접영을 쉽게 배우고, 여자들은 몸이 유연하고 균형감각이 좋아서 평영과 배영을 쉽게 배운다는 거였다.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평영을 배울 때 고생깨나 했고, 지금도 제일 힘든 영법이 평영이다. 평영을 잘하기 위해서는 골반이 부드러워야 하는데 어찌나 몸이 뻣뻣한지 부드러운 발차기가 쉽지 않다.
여자들이 언어 지능지수가 더 높은 것도 균형 때문이다. 뇌의 좌반구가 주로 언어를 처리하지만 언어 기능은 양쪽 뇌에 모두 있다. 양쪽 반구가 뇌들보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데, 여자들은 뇌들보가 남자보다 훨씬 많다. 여자들이 뇌의 균형감각이 훨씬 좋고 언어적 지능지수가 높다는 뜻이다. 좌반구에서 뇌출혈이 일어났을 때 언어 능력 손상으로 고생하는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많고 난독증을 극복하는 경우도 여자가 많은 게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내가 만난 수영 선생님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총 4명의 수영 선생님을 만났는데(남자 2명, 여자 2명), 남녀의 차이가 컸다. (이런 걸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남자 선생님은 주로 몸으로 수영을 가르쳤고, 여자 선생님은 주로 이야기로 수영을 가르쳤다. 남자 선생님은 “자, 저를 잘 보세요, 이렇게 웨이브를…”이라고 가르친다면 여자 선생님은 “자, 머릿속으로 커다란 S자를 떠올리고 그걸 따라 그린다고 생각해보세요”라고 가르쳤다. 내 경우엔 여자 선생님이 훨씬 잘 맞았다. (제가 남자라서 그런 게 아니고) 말로 설명해주는 게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이제는 더이상 강습을 받지 않지만 수영을 할 때면 여전히 선생님의 말이 내 몸을 가르치고 있다.
예전 수영 입문 시절, 염소의 맛에 점점 익숙해지며 크롤영을 배울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팔젓기를 열심히 연습하다가 수영 선생님에게(여자 선생님이었다) 이런 질문을 했다.
“왼쪽 팔을 저을 때는 괜찮은데, 오른쪽 팔을 젓기 시작하면 몸이 가라앉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고민 상담을 받은 선생님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이렇게 되물었다.
“오른손잡이시죠?” “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왜 불안한지 아세요?” “음, (그걸 모르니까 물어본 거잖아요) 모르겠어요.” “왼손을 저을 때는 오른손이 앞에 있잖아요. 오른손이 안정적으로 앞에 나가 있으니까 안심하게 되죠. 반대로 오른손을 저을 때는 왼손이 앞에 있으니까 불안한 거고요.” “아, 그러니까 오른손이 왼손을 믿지 못하는 거군요.” “네. 믿지 못하는 겁니다.” “믿으면 되겠네요?” “처음엔 믿기가 쉽지 않아요. 아까부터 쭈욱 봤는데 (네, 그게 선생님이 하실 일이지요)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건 어깨부터 손까지 힘이 다 들어가 있다는 뜻이에요. 어깨에서 힘을 빼고 그냥 자연스럽게 팔을 흔드세요.”
간단한 문제다. 어깨에서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팔을 흔들면 오른손이 왼손을 믿게 되고 물에 뜰 수 있게 된다. 말이 그렇지, 그게 쉽게 될 리가 없다. 오른손이 왼손을 믿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영이 잘 늘지 않을 때마다 저 말을 생각했다. 오른손이 왼손을 믿도록, 어깨에서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그 말을 생각하면 몸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이 하나 있었다. 안경점에서 있었던 일인데, 이건 야구 이야기와 함께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