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빴어(한숨). 달리 말하기 참 힘들다. 사연은 이렇다.
미스터리 소설 팬이라면 누구라도,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을 ‘최소한’ 열댓권 정도는 갖고 있을 것이다. 나로 말하면 중학생 때였던가, 용돈을 모아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을 한권씩 사모았던 게 처음이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전집을 버린 뒤 사고 읽고 이사 때 버리고를 반복해 모르긴 해도 지금까지 총 150권 정도는 샀을 것이다. 이 시리즈는 애거사 크리스티 재단과 정식 계약한 출판사 황금가지가 총 77권으로 지난여름 완역판으로 완간시켰다. 77권이나 되니까 사람마다 다 다른 책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거나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일 거다.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영화판 제목은 <셔터 아일랜드>)을 비롯해 지금까지도 수많은 소설들이 트릭의 구조를 응용해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믿을 수 없는 화자’ 트릭의 전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그 흔적이 보이는 ‘1/n’ 범행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오래된 민요나 동요 가사를 새겨듣게 만들고 죽은 자도 다시 보게 만드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같은 책은 반복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세권의 책에 대한 애착은 전세계 독자와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인 듯하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직접 뽑은 베스트10, <가디언> 선정 애거사 크리스티 베스트10,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 베스트10 모두 저 세권의 책은 기본으로 깔고 간다. 그리고 세개의 베스트10 목록을 바탕으로 ‘애거사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가 출간되었다. 일단 장정이 달라졌다. 페이퍼백이고, 표지가 몹시 훌륭하다. “어머, 이건 사야 해!” 물론, 표지들이 고전 미스터리보다는 하드보일드 시리즈 같은 인상이라는 흠을 잡을 수는 있지만 높은 예술점수에 더해 완역판 페이퍼백이라는 기능적인 면에서의 우수함까지 갖추고 있다. 책이 영혼을 살찌운다고 누가 그랬나. 이 10권에 한정해서는 물욕의 대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 책을 받은 나는 장영엽 기자에게 보여주며 “사고 싶지!”라고 자랑했다. 장영엽 기자에게도 이 책들은 이미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어머, 이건 사야 해!” 혹시 나머지 67권도 이렇게 표지를 바꾸고 페이퍼백으로 낼 예정이냐고 출판사에 물었더니 그런 계획은 없다고 한다. 그럼 10권만 페이퍼백으로 갖고 있는다 치면 기존에 있던 같은 책의 하드커버판은 어쩌지? …출판사 나빴어….
그렇다고 이번 에디터스 초이스 시리즈가 예측 가능한 인기작만을 낸 건 아니다. 특이하게도 <다섯 마리 아기 돼지>가 포함된 것. 에르큘 포와로가 16년 전의 살인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내용을 그린 작품. 크리스티 팬이면서도 이 책 제목이 낯선 독자라면 이 한권만큼은 주저하지 않고 사볼 만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