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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화] 낭만으로 보고 운명으로 느끼는

유덕화

홍콩의 영화감독 두기봉이 <풀타임 킬러>(2001)에 관한 인터뷰를 하는 중이다. “만약 누군가가 더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기를 원한다면 <풀타임 킬러>처럼 하면 안 됩니다. 공동감독 위가휘와 저는 무엇이 관객이 좋아할 만한 영화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의 흥미를 따라 만든 영화입니다. (중략) 만약 관객이 환호할 만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면 이런 영화를 하진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다음 프로젝트로 그런 걸 할 계획입니다.” 기자가 반문한다. “하지만 <풀타임 킬러>는 꽤 수익을 냈습니다. 홍콩에서는 상업적인 성공도 거뒀고요, 그렇지 않던가요?” 상업적 고려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흥미를 따랐다고 답하는 감독에게, 그렇다면 그 흥행의 요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반문이다. 그러자 두기봉의 간결한 대답. “그 영화가 홍콩에서 성공한 건 유덕화 덕분이에요. 그는 빅 스타예요, 그리고 그는 지난 두편의 영화로도 큰 흥행을 올렸지요. 사람들은 그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유덕화를 좋아한다. 때로는 감독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괴짜 같은 영화를 만들어도 유덕화가 나오면 흥행한다. 그게 홍콩에서의 유덕화의 입지를 알려준다. 한 조사기관이 ‘1985년에서 2005년 사이 홍콩영화 박스오피스에 막강 영향력을 행사한 배우는 누구인가’라는 조사를 했을 때, 1위에 오른 주인공이 유덕화였다. 2위 주성치와 3위 성룡과는 큰 차이가 났다. 사정은 우리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홍콩에서 건너온 ‘4대 천왕’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른바 장학우, 곽부성, 여명 그리고 유덕화를 가리켜 칭송하는 말이었는데, 이 배우들 중에서 적어도 우리에게 유덕화에 비견할 정도로 여전히 강력한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배우는 드물다. 실은 우리도 유덕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왜 좋아할까. 50대 초반에 벌써 160여편이 넘는 작품에 다작 출연한 이 배우의 전체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며 비밀을 일일이 해명하는 건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다만 비교적 친숙한 2000년대 이후의 몇몇 주요 출연작에서 몇 가지를 환기해볼 수는 있다. 가령 젊은 시절에 유덕화의 오래되고 특별한 면모 중 하나는 장렬한 비극성이었다. 그것이 홍콩 액션영화의 일반적인 추세였다고는 해도 그의 비극은 유독 더 슬프고 안타까웠다. 그건 그의 이미지와 관계있어 보인다. 선인을 연기하건 악인을 연기하건 유덕화는 비열함과 야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화 속 악인과 선인의 구분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그는 올곧으며 의리 있는 인물로 자주 등장했다. 그런 인물에게 찾아오는 비극 혹은 곤경이란 더 부당해 보였고 더 안타까웠다. 유덕화의 2000년대를 대표할 만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무간도> 시리즈에서 그런 면모는 거의 운명의 영역이 된다.

한편 그는 낭만적인 다정함과 따뜻함도 지녔다. 그것이 그를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거나 코미디영화의 주인공이 되게 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이가 들어서는 <심플 라이프>와 같은 보석 같은 영화를 가능하게 했다. <심플 라이프>는 유덕화가 그저 잘생긴 배우 혹은 멋지게 늙어가는 배우라는 사실을 넘어서는, 다정하고 따뜻한 세부적 교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 얼마나 본능적으로 능한 배우인지를 입증한 영화였다. 60여년간 집안의 가정부로 일하다 중풍에 걸려 쓰러진 아타오를 정성껏 모시는 주인공 로저 역할은 유덕화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명연기를 자아냈다. 영화제작자인 로저가 시사회가 있던 날 아타오를 초청해 영화를 보여주고는 두 사람이 한적한 골목길을 함께 걷는다. 그때 로저가 위험하지 않은 길 안쪽으로 아타오가 걸을 수 있도록 자리를 바꿔준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뒷짐을 지고는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걷는다. 이 정겨운 장면에 대해 유덕화는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때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으며 그게 <심플 라이프>의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라고도 말했다.

두기봉의 영화에서라면 유덕화는 종종 저 두가지 이미지 또는 연기의 본성을 감독의 지휘 아래 장르적으로 마음껏 밀어붙이고 왜곡하고 유희한다. 스스로도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은, 범죄자이지만 악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인물로 출연한 두기봉의 영화 <암전>(1999)을 두고 그는 말한다. “그전에는 얼굴과 몸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면, <암전>은 눈빛으로도 감동을 줬다고 생각한다. <암전>을 했기 때문에 <무간도>를 할 수 있었다.” <암전>에서 더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 킬러 세계의 일인자가 되고 싶어 하는, 콤플렉스와 정신분열 환자에 가까운 인물로 등장한 <풀타임 킬러>가 그렇다.

혹은 그의 다정함과 따뜻함은 두기봉의 영화에서 우스꽝스러운 커플 중 한명의 모습으로 바뀌기도 한다. 대부분은 여배우 정수문과 호흡을 맞출 때 그런 영화가 나온다. <니딩 유>(2000)에서는 직장의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 만나 옥신각신하더니 <용봉투>(2004)에서는 도둑 커플로 나와 같은 패턴의 다른 이야기를 반복한다. 홍콩에서 두기봉, 유덕화, 정수문의 합은 이미 오래전부터 흥행 청신호로 통할 정도다. 정수문이 서투르고 괄괄한 여자주인공을 맡을 때 유덕화는 다소 깐깐하지만 마음 깊숙이는 너그럽고 다정한 남자주인공을 맡는 식이다. <블라인드 디텍티브>에서 그들은 홍콩 매체들이 종종 지적하는 것처럼 마치 셜록 홈스와 왓슨의 관계마냥 서로를 보완해주는 역할이다. 그러므로 <블라인드 디텍티브>는 두기봉의 전작 중 하나인 <매드 디텍티브>의 일부 맥락을 가져온 것이기도 하지만, 더 주요하게는 역시 이 아옹다옹하는 커플의 근 10년 만의 재탄생이자 유덕화 연기의 또 다른 변종이다.

<블라인드 디텍티브>의 시각장애인 형사 ‘존스턴’을 연기하기 위해 유덕화가 갖추어야 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시각장애인의 생활상이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과 오래 생활하며 그들이 어떻게 사물을 만지고 서로 대화하고 느끼는지를 익혔다고 한다. 그 결과 영화에서 그의 연기는 자연스럽다. 특히나 작은 손동작들이 그걸 말해주는데, 음식을 먹는 장면에서 그릇을 앞에 놓고 위치를 재는 자세나 길을 걸을 때나 집 안에서 이동할 때 사물의 지형을 알아채는 방식을 보면 그렇다. “나는 표면적으로 그 인물을 연기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느낌과 심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라고 유덕화는 말하기도 했다. 그 면밀한 사전 준비가 그의 오래되고 본성적인 낭만적 다정함과 따뜻함과 결합되자, 실은 결합하되 살짝 왜곡되자 또 하나의 인물 ‘존스턴’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다른 모든 신경을 동원하여 정의를 실현할 때 혹은 정의를 실현하는 가운데 우스꽝스러워질 때 장르적으로 왜곡된 유덕화의 이미지를 우린 즐기게 된다.

물론 <블라인드 디텍티브>가 두기봉 영화의 최고작도, 유덕화 연기 인생의 최고작도 아니라는 건 유덕화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가령 개봉 뒤 홍콩에서 이 영화에 대한 별점은 제작진의 기대보다 낮았던 모양이다. 누군가가 <블라인드 디텍티브>가 별 다섯개 만점에 두개밖에 못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가 웃으며 하는 대답. “별 두개요? 별 두개 정도는 뭐 예전에도 꽤 받았는걸요.” 반면 당신이 연기한 캐릭터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한다. 언제나 “다음 작품의 인물”이라고. 그러니 별점에 연연하지 않고 다음 작품을 자신의 최고작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이미지로 전진하는 것에도, 왜곡되는 것에도 두려움이 없는 이 사내의 매력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블라인드 디텍티브>

magic hour

내가 봐도 근사해!

유덕화 자신이 뿌듯해하는 <블라인드 디텍티브>의 순간들이 있다. 첫 번째는 카지노 장면이다. ‘존스턴’(유덕화)은 ‘허쟈단’(정수문)과 함께 연쇄살인 용의자로 보이는 한 남자와 카지노에서 한 테이블에 앉는다. 그러고는 카드 게임이 벌어지는 동안 있는 힘껏 그를 약올린다. 그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살인 본능이 발동하고 자신들을 위협하면 즉각 현장범으로 잡을 생각이다. 이때 유덕화의 위악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장르적 연기에 스스로도 만족한 듯싶다. 또 한 장면이 있다. ‘허쟈단’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계획은 어그러지고 ‘존스턴’ 혼자 살인 용의자가 모는 택시 안에 있게 된다. 남자는 차를 몰고 점점 더 후미진 곳으로 가고 앞을 보지 못하는 ‘존스턴’은 살아나갈 방법을 궁리하며 덜덜 떨지만 겉으로는 온갖 넉살을 다 부린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실제로 그 장면은 촬영된 것보다 훨씬 짧게 나오기는 했지만, 내 생각에는 내가 그 장면에서 근사한 연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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