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 유홍준의 책 서문에 나오는 문장처럼 어떤 대상을 찬양하거나 혹은 비판하려면 먼저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흔히 보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보수주의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이라도 읽으라고 하는데, 사실 일반인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보수주의의 성전은 에인 랜드의 소설 <아틀라스>가 아닌가 한다. 에인랜드는 자신의 책이 표방하는 사상에 ‘객관주의’라는 독특한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보수, 자본주의, 우익, 혹은 개인의 제한받지 않는 자유를 강조하는 모든 사조를 이만큼 극적으로 옹호하는 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주된 줄거리는 ‘자본가들의 파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슘페터가 말하는 ‘혁신’을 그대로 체화한 듯한 기업가들이다. 미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회사의 부사장인 주인공인 대그니 태거트를 비롯하여, 강철보다 가볍고도 강한 금속을 개발한 리어든, 정전기를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사실상 무한동력의 모터를 개발한 존 골트 등은 말 그대로 세상을 먹여살리는 사람들이다. 자질도 뛰어나지만 성취를 위해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는 자신의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이며, 목적이 없는 인간만큼 타락한 인간은 없다.
그러면 이들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능력이 없으면서도 과실을 따먹으려고 하는 사람들, 약자를 배려한다는 명목하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정부, 기회 균등과 공공의 이익을 부르짖으며 기업의 성장을 제약하려는 사회. 이런 ‘약탈자’들에게 ‘희생’되어온 우리의 주인공들은 결국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자기들만의 비밀 아지트로 숨어들어간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세상은 혼란과 빈곤의 늪에 빠진다. 결국 마지막까지 버티던 뉴욕시에 전기가 나가는 것이 이 디스토피아 소설의 결말.
극단적으로 개인의 능력과 성취만을 강조하고 연대와 배려를 악으로 치부하는 이 책에 동의하기란 어렵다.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로빈 후드를 가장 부도덕하고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로 보는 것도 그렇지만, 소득세를 걷지 말아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과연 에인 랜드가 말하는 정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957년에 나온 이 책이 수십년 동안 성경 다음으로 미국인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 책으로 꼽히고 지난 금융 위기 때 다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경쟁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힘을 합하기보다는 개인의 성공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고 이기적으로만 보이는 현대사회를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읽어둘 만하다. 아는 만큼 미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