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님, 변호사님!”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송강호)는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국밥집 아줌마 순애(김영애)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구치소 면회만이라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그의 하나뿐인 대학생 아들 진우(임시완)의 고문받은 모습에 충격을 받고서 변호인을 자청한다. 우석 내면에 잠자고 있던 정의로운 다혈질을 일깨우는 국밥집 아줌마가 바로 김영애다. TV드라마 <로열 패밀리>(2011)에서 냉철한 JK그룹의 회장 공순호, <메디컬탑팀>(2013)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병원 부원장 신혜수 등을 떠올려보면, 주방 앞치마에 젖은 손을 쓱쓱 문지르며 질펀한 부산 사투리를 쓰는 김영애의 모습이 낯설기도 할 것이다. 상반기에 공개될 이돈구 감독의 <현기증>, 이제 막 고사를 지내고 크랭크인에 들어가는 부지영 감독의 <카트> 등 앞으로도 흥미로운 라인업은 계속된다. 이제부터가 진짜 배우로서의 화양연화일 것 같다는 얘기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더없이 밝다.
-<변호인>이 6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조만간 1천만 관객 돌파가 예상됩니다. =실제로 ‘만원사례’라는 게 있었죠. 20대 초반에 연극을 서너편 했어요. <중매인> <학마을 사람들> <홍당무> 같은 작품이었는데, 정확히 어떤 작품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극장에 사람들이 꽉 차서 봉투에 만원을 넣어서 돌렸던 기억이 나요. 극장 자리가 꽉 차서 찾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하는 정도가 되면 감사 표시를 한 거죠. 이제는 봉투를 돌리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때 기억이 떠오르네요. (웃음)
-맨 처음 출연제의를 받았을 때 어떠셨나요.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정치적인 색깔이 선명하다는 생각에 좀 망설이긴 했어요. 그래도 받자마자 단숨에 다 읽어내려갔을 정도로 흡인력이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현재 내 이미지가 <로열 패밀리>나 <메디컬탑팀>처럼 너무 고급스럽고 딱딱한 이미지라 변화를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죠. 오래전에 TV드라마 <형제의 강>(1996), <야망의 전설>(1998)에서도 <변호인>에서와 비슷한 역할을 맡긴 했지만 요즘 관객은 잘 모르지 않겠어요? 그래도 이런 다큐 같은 영화가 흥행이 될지 걱정하긴 했죠. 우리 소속사(판타지오) 관계자들에게 “이런 내용으로 흥행이 될까?” 반문했으니까. (웃음)
-그래도 출연을 결정한 이상 함께 달려가야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냉정한 편이에요. 사실 주변에 물어보는 건 별 의미가 없어요. 좋은 말은 해주기 쉽지만 냉정한 얘기는 쉽지 않거든요. 아무래도 제가 현장의 최고 선배가 되다보니 어떻게 저한테 아쉬운 소리 하겠어요. 그래서 내가 나를 평할 때 가장 무섭다고 해야 하나. 잘했다, 못했다,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어요.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저것밖에 안 되나, 라고 생각하면 정말 속상하죠. <변호인>을 보면서도 왜 저렇게 했을까, 한숨이 나올 때도 있었으니까.
-어떤 장면인가요. =경찰들이 들이닥쳐 아들이 끌려나가는 장면이에요. 엄마로서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완전히 숨이 꼴깍 넘어가야 하는 장면인데, 왜 표현이 저것밖에 안 되는지 아쉬웠어요. 법정 신도 개인적으로는 불만이 많아요. 그 이야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여준 느낌이 들어서죠.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사실 촬영하면서 딴짓을 했거든요. (웃음) 법정에 앉아만 있는 역할이다 보니 분장실에서 분장 마치고 몇 시간 있다가 촬영에 들어가니까 남는 시간에 책을 읽었어요. 한국계 미국 작가 이창래의 <생존자>라는 소설인데, 6.25 전쟁을 배경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전쟁이 개인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그 참상을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현장에서는 내내 딴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촬영현장에서 절대 다른 데 정신팔면 안 되는데, 너무 잘못했죠.
-굳이 그런 얘기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셔도 되는데. (웃음) 무엇보다 배우로서 스스로에게 정말 엄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과 비교해도 비교적 집중을 잘하는 편이고, 배우로서 그 훈련만 40년 넘게 한 거잖아요? 그러니 더 그럴 수밖에 없죠. 사실 제작진한테 불만도 있어요. <변호인>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아들이 잡혀가고 송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울며불며 부탁하는 장면, 구치소를 찾아가 고문당한 아들을 처음 보는 면회 장면을 첫 번째, 두 번째로 찍었어요. 이런저런 사정 때문이긴 했지만 감독한테 참 많이 툴툴거렸죠. (웃음) 국밥집 아줌마 순애가 나에게 들어오기 위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데 바로 그런 장면들을 촬영해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망치면 어떡하나, 정말 긴장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금방 끝났어요. 촬영시간 자체가 오래 걸릴 것 같아서 판타지오 지석환 실장이 응원하러 촬영장에 오기로 했는데, 제작부장이 얘기한 예상시간보다 촬영이 더 빨리 끝나서 지 실장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내가 떠나고 없었죠. (웃음)
-<애자>(2009)에서 이미 질펀하고 거친 부산 사투리 연기를 하신 적 있지만, 아무래도 그동안 맡아오셨던 역할 때문인지 <변호인>의 국밥 아줌마 역할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실제로 영화 속 집으로 설정된 부산 영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알고 있습니다. =몇년 전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어렸을 적 살던 영도 집을 찾아간 적 있어요. 어렸을 때 그렇게나 넓어 보였던 신작로가 왜 그렇게 좁은지(웃음), 마당이 넓던 집도 이제는 연립주택이 들어섰고. <변호인>에 나오는 영도 집도 거기서 차로 한 5분 거리에 있었죠. 어렸을 때 생각하면 어떤 식으로든 전쟁의 후유증이 컸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먹고사는 걱정 안 하는 집안의 3대 독자였는데, 금이야 옥이야 하던 아들이 6.25 전쟁터에 나가니 ‘아들이 쌀밥을 못 먹을 테니 우리도 쌀밥을 먹을 수 없다’는 할머니로 인해 집안이 전혀 어렵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보리밥만 드셨대요. 그렇게 음식을 못 드셨던 어머니가 나를 낳고서는 이튿날 그 전쟁통에(1951년생) 맹장수술까지 하셨어요. 나 역시 중학생 때 심하게 앓기도 하고,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면 늘 아팠던 기억밖에 없어요.
-그처럼 배우 김영애의 지난날을 거꾸로 되짚어보면, 어딘가 장차 배우가 될 김영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단서 같은 게 있을까요. =아마도 나를 배우로 만든 건 동화책이었던 것 같아요. 집에는 그런 책이 거의 없었고 하굣길에 문방구에 있는 책 구경을 했어요. 사지는 못했지만 주인아저씨가 서서 읽게는 해주셔서 참 많은 책을 봤죠. 엄청나게 다독을 했는데 앙드레 지드 전집이 유독 기억에 남아요. 그런 독서 습관이 나를 또래 애들보다 어딘가 조숙하고 비현실적인 성향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어요. (웃음)
-당시 고 노무현 대통령이 졸업한 부산상고만큼이나 명문이었던 부산여상을 졸업하고 은행원으로 일하다 1971년 MBC 공채 탤런트로 합격하셨습니다. 어쩌면 등하굣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수도 있는? (웃음) =하 그렇게 되나요? (웃음) 20살 때 서울에 올라와 21살부터 탤런트, 배우 생활을 했으니 이제 고향에서 보낸 시간보다 2배 넘게 서울생활을 했는데, 그래도 내게 부산은 변함없는 고향이죠. 우연히 서울에 다니러 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 주위에서 ‘시험 한번 봐라’고 해서 MBC 공채시험에 응모했다가 운 좋게 됐죠. 돌이켜보면 정치쪽으로는 너무 무관심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5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는 연기와 사업을 오가며 정말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남들의 3배, 4배 일하며 살았죠. 부끄러운 얘기지만 고 노무현 대통령의 청문회 이야기도 나중에야 알았으니까, 그런 분의 존재도 모르고 살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요즘 인터넷 댓글이라는 걸 처음 보면서 노빠, 일베, 일베충, 그런 단어들을 접하게 됐어요. 내 기사 밑에 내 연기 얘기는 별로 없고 그냥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더라고요. (웃음) 세상에 참 이상한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건강하고 상식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세상에 훨씬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오래전 왜 영화계를 마치 은퇴하듯 일찍 떠나셨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른바 1970년대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 트로이카 못지않은 활동력을 보이셨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고영남 감독의 호러영화 <깊은 밤 갑자기>(1981)가 특별히 기억납니다. =컬트영화라고 하던가, <깊은 밤 갑자기>는 나 때문에 잠을 못 잤다는 젊은 팬들이 많더라고요. (웃음) 마지막 컷은 내가 생각해도 몽환적이고 으스스해요. <왕십리>(1976), <깃발 없는 기수>(1979) 등 임권택 감독님 작품에 출연할 때도 좋았고, 고영남 감독님은 특별히 아껴주셨던 분이라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돌아가셨을 때 개인적인 처지가 너무 안 좋을 때라 찾아뵙지 못해 지금도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어요. 돌이켜보면 20대 때는 너무 외골수에 내성적이라 당시 ‘영화판’과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감당이 안 됐고 너무 거친 사람들이 많아서 헤쳐나가기 힘들었죠. 고약한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웃음)
-그렇게 떠나셨다가 한참 뒤 출연하신 고 곽지균 감독의 <겨울나그네>(1986)에서 클럽 포주 역할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곽지균 감독은 말씀하신 그런 ‘고약한’ 사람과 정말 거리가 먼 분이었던 것 같고요. =맞아요. 너무 좋은 사람이었죠. 그렇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 슬펐어요. <겨울나그네>는 순전히 사람에 대한 신뢰 때문에 했어요. 그가 <깃발 없는 기수> 조감독을 하기도 했거든요. <겨울나그네> 시나리오를 가지고 방송국에 3번이나 찾아왔어요. 그때 저는 영화를 할 생각이 없었고 방송국 스케줄만으로도 너무 바빠서, 시나리오나 내 역할을 보기도 전에 “영화 안 해요” 그랬어요. 그랬는데도 3번이나 찾아온 것에 감동했다고 해야 하나. 지인 얘기로는 극장에서 <겨울나그네>를 보는데 내가 등장하니까 관객이 ‘오오~’ 그러더래요. 사납게 막말하는 포주로 등장하는 모습이 TV드라마 이미지와는 너무 달라서 신선했나 봐요.
-최근에는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실연의 달콤함>(2013)에 출연하신 모습을 보고 그런 신선함 이상의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영화 속에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도 직접 라이브로 부르셨고요.(웃음) =사실 단편이라는 게 배우로서 잠깐 수고하는 건데, 그 잠깐의 수고가 누군가에게 큰 기회가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내면을 드러내는 내용도 좋았고요. 그리고 배우로서 저의 자랑이라면 대사를 정확히 빨리 잘 왼다는 건데, 원래 음치인 데다 왜 그렇게 노래 가사는 외기 힘든 건지. (웃음)
-아직 공개 전인 이돈구 감독의 <현기증>도 기대됩니다. 치매에 걸린 엄마 역할입니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지만 정작 거기에 ‘나’는 없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그 이야기 안에서 어떤 전형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거죠. <현기증>은 언제 또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이었어요. 그동안 배우로 살며 뽑아 먹기만 하면서 정작 채우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나 스스로를 테스트하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내가 배우로서 어디까지 파고들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메디컬탑팀> 일정이 다 나온 다음인데도 불구하고 무리를 했어요. 물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긴 했지만. (웃음) 그리고 부지영 감독의 <카트>는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 비록 역할은 작지만 명필름과 심재명 대표에 대한 믿음으로 무조건 출연하기로 했죠.
-혹시 배우로서 ‘스승’으로 생각하는 선배나 인물이 있다면요. =정혜선, 김혜자, 김용림, 김영옥 선배 등이죠. 특히 TV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2010)에서 김용림 선배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정말 대단해요. 과연 내가 나중에 저런 연기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을까 묻곤 하죠. 아마도 현역으로는 김영옥 선배가 제일 위일 텐데 지금도 그 발음이나 표현이 정확해요. 결국 배우가 오래갈 수 있는 힘은 탄탄한 ‘기본기’인 것 같아요.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 <꽃보다 누나>를 보면서 연기 외의 욕심이 나거나 하시진 않나요. =가장 하고 싶은 건 시트콤이에요. 오래된 고향 친구들은 지금도 저를 보면 “니는 가마있어도 시트콤이다. 그러니까 절대 시트콤 하면 안 된대이, 니 지금까지 해온 거 다 뽀록난다” 그래요. 사실 2003년에 <달려라 울엄마>라고 1년 정도 정말 재밌게 한 적 있는데, 별로였는지 그 뒤로 연락이 없더라고요. (웃음)
-짧은 단편이지만 <실연의 달콤함>을 포함해 <변호인>, 그리고 <현기증>과 <카트>에 이르기까지 이미 많은 걸 이뤄놓은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뭔가에 더 도전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동안 일이 싫을 때가 있었어요. 연달아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도 하고 너무 힘들어서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죠. 그러다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살인범이다>(2012)와 TV드라마 <해를 품은 달>(2012)에 출연했지만, 정말 생각지도 않게 암 진단을 받고 거의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죠. 열심히 하려고 마음을 다잡아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하고 말이죠. 9시간의 대수술을 받고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그런 기분을 벗어나게 해주는 건 ‘일’인 것 같더라고요. 수술하고 6개월 만에 TV드라마 <내 사랑 나비부인>을 하느라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이게 얼마나 큰 병이고 큰 수술인지 너무 우습게 안 거죠. 그러니까 이제는 이래야겠다, 저래야겠다, 계획조차 염두에 두지 않아요. 그냥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죠. 지금은 계속 그런 도전을 하고 싶은 시기인 것이고. <변호인>을 끝내고서도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배우의 즐거움이 별건가, 좋은 배우들하고 멋지게 호흡하는 게 전부지. 그래, 더 많이 하자. 나를 행복하게 만들자. (웃음)
소속사에서 배우 김영애의 뒤늦은 도전을 잘 지원해주냐고 물었더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유행어를 구사했다. 너무 놀라 웃을 겨를도 없었다. “판타지오가 잘 케어해주잔나.”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의 김준호를 너무 좋아한단다. 그리고 “내가 출연한 드라마도 그런 적 없는데, 난생처음 드라마를 유료 결제해서 봤다”며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열렬한 팬이라고도 했다. 나정(고아라)의 남편이 누구인지 너무 궁금해서 마지막회를 유료로 볼 수밖에 없었다며 “쓰레기랑 결혼할 줄 알았다”며 흥분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천진난만하게 보였고, 매번 자유자재로 큰 폭의 변신을 보여주는 대배우의 풍모는 온데간데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런 변신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쓰레기(정우)와 칠봉이(유연석) 중 누가 더 마음에 드는지 물었더니, 그저 욕심 많은 여고생 같은 답이 돌아왔다. “쓰레기와 칠봉이 반반씩 섞어놓은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