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mix&talk
[오멸] “작가가 가장 자주 해야 하는 건 배신이다”
송경원 사진 백종헌 2014-01-08

<하늘의 황금마차> 후반작업 중인 오멸 감독

명성은 때때로 본질을 흐린다. 2013년 영화계에 신선한 활력을 안긴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는 어느덧 오멸 감독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오멸은 <지슬>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저 오멸일 따름이다. 그는 오늘도 여전히 자신만의 언어, 지속 가능한 자신만의 작업방식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어이그, 저 귓것>(2009), <뽕똘>(2009), <이어도>(2011), <지슬>(2013)까지 오멸의 영화들은 형식적인 성취는 물론 제작 방식에서도 실험과 도전정신 위에 놓여 있다. 변하지 않는 건 그가 멈추지 않을 거란 사실뿐. 새로운 도전의 기운은 오멸 감독의 차기작 <하늘의 황금마차>에서도 어김없이 도드라진다. 호황이라곤 하지만 비슷한 기획영화가 쏟아졌던 2013 한국 영화계를 돌이켜보며 2014년의 오멸은 어떤 결과물로 또 한번 우리의 게으름을 깨워줄지 궁금해졌다. 형제들과 함께 음악 여행을 떠나는 <하늘의 황금마차> 속 하르방처럼 영화라는 여행길 위에서 걷고 또 걷고 있는 오멸 감독에게 물었다. 영화와 인생은 어떻게 닮아가나요.

-방금 전까지 녹음을 하고 왔다고 들었다. 많이 바쁜 것 같다. =<하늘의 황금 마차> 엔딩에 실릴 합창곡 녹음을 마치고 왔다. 주말에는 자파리극단 공연도 하고. 이번에 7번째 창작극을 올렸는데 협력연출을 맡았다. 원래 연극이 업이었으니 영화를 짬짬이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웃음)

-<지슬>을 빼놓고 2013년 영화를 이야기할 수 없다. <씨네21> 올해의 영화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슬> 이후 주변 반응이 바뀐 걸 실감하나. =영광이다. 개봉 이후 한동안 <씨네21>을 못 챙겨봤는데 꼭 봐야겠다.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실감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가끔 식당에 가면 알아보는 정도? 관객 14만명이 들었다고는 하지만 경제적인 부분이 달라질 정도로 크게 수입이 는 것은 아니다. 굳이 찾자면 ‘우리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긴 정도….

-그래도 차기작을 만드는 데 좀더 수월하지 않을까. =솔직히 더 어려워졌다. 다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의욕이 더 앞서는 상황이랄까. <지슬>은 우리에게도 기회이자 위기였다. 외부에서는 많은 것들이 좋아지지 않았느냐고 얘기하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더 큰 위기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의 황금마차>는 좀더 자유로웠던,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 계기가 됐다. <지슬> 개봉 즈음에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제안을 받았는데, 그 당시 <지슬>을 떨치고 싶은 마음에 덥석 수락했다. 결국은 호되게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지금은 감사한다.

-촬영이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6월9일에 크랭크인해서 7월20일까지 촬영을 끝냈는데 이게 패착이었다. <지슬> 때 한달 보름 정도를 촬영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거기에 맞춰 스케줄을 짰는데 완전 미련한 짓이었다. <지슬> 때는 모두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찍었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좀더 열린 현장을 목표로 했었다. 인권영화 프로젝트인 만큼 스탭들의 인권을 존중해주는 현장을 만들어가고 싶었다. 스탭들과 캠핑도 가고 야간촬영을 최대한 줄여 정시에 출퇴근하고. 같은 시간 안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다보니 막상 현장에서는 생각만큼 운용이 원활하지 못했다. 스탭들도 <지슬>이 잘됐으니 이번에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의욕이 앞서는 통에 힘 빼는 일이 그렇게 힘들었다.

-추가촬영이 있다고 들었는데 총 몇회차 촬영으로 마친 건가. =그런 걸 계산하지 않고 찍는 편이라 잘 모르겠다. 어떤 날은 2시간만 찍고 들어오는 일도 있었고 준비가 안 되면 뒤에 다시 준비해서 찍자고 철수한 날도 많다. 그래도 원칙 하나는 스케줄에 쫓기지 말자, 찍고 싶을 때 찍자, 였다. 처음에는 스케줄에 끌려다녔는데 그게 온전히 연출에 유리한 상황만은 아니었다. <지슬> 때는 최대한 스탭들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조명세팅하는 데 시간을 충분히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하늘의 황금마차>를 찍으면서는 모두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낼 수 있는 환경이 없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결과적으로는 의도치 않게 옆으로 쓸리는 경우도 생긴다는 걸 배웠다. 원래는 부산영화제에 출품하려 했지만 도저히 남에게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 여름에 1차 촬영을 마치고 우리의 한계와 싸우는 시간을 가졌다. 이전 영화들보다는 예산이 늘었다고 하지만 세상에 내놓을 때는 저예산영화 아닌가. 그럼 차라리 시간적인 자유로움이라도 주십시오 하고 인권위쪽에 부탁했다. 덕분에 11월부터 추가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고 12월 초까지 빈 부분을 채워나갔다. 시간적인 여유를 얻으니 조금은 자유로워지더라.

-금전적인 부담도 적지 않았을 텐데. =인권위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결심한 첫 번째 이유가 그 어떤 곳보다 현장의 자유로움을 보장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다. 남에게 명령받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편인데 그래서 상업영화를 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도 생기고 그러다보니 예산이 더 들어갔다. <지슬> 때 워낙 사람들을 고생시켜서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혜택을 주려 노력했는데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라.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그렇게 하기로 한걸. 그래봤자 스탭들 식사 더 챙겨주고, 좀더 재워주고 하는 정도다. 결과적으로 <지슬>로 생긴 수입은 거의 다 들어간 것 같은데 티도 안 나더라. (웃음)

-단순 비교하자면 <지슬> 때보다 스탭 규모가 늘어난 건가. =예산은 비슷한데 스탭은 훨씬 많아졌다. 하도 고생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누가 이런 인력이 더 필요하다고 하면 흔쾌히 수락했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식구가 불어나 있었다. 그래봤자 다른 현장과 비교하면 작은 규모지만 그게 막상 현장에서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미처 몰랐다. 가령 한 장면을 찍고 즉흥적으로 앵글을 뒤집어 찍으려 해보니 뒤에 우리 스탭 차가 11대나 서 있는 거다. 공간이 협소해서 다른 곳에 차를 세워둘 수도 없고. 그 순간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이게 뭔가 싶더라. 애초에 정확한 콘티를 세우고 로케이션을 해야 하는 거였지만 원래 작업 스타일이 현장에서의 자유로운 운용을 중시하는 편이라 그런 난관이 생길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장면을 포기한 경우도 있었다. 그 이후로는 촬영하면서도 내가 이미 머릿속에 한계를 그리고 있더라. 제주도의 특정 장소를 들어가고 싶은데 분위기나 풍광보다 주차공간이 있나 없나를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지금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거지’라고 수도 없이 자책했다.

-<지슬> 때도 이전과 달리 조명 등의 전문 스탭들을 과감히 기용하여 작업 방식에 변화를 주려 했던 걸로 알고 있다. 현장과 시스템에 관한 고민은 지속적으로 해오던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뭐가 달랐던 건가. =상투적인 것, 반복되는 걸 싫어한다. 이번이 다섯 번째 작품인데 해마다 시스템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기존의 시스템을 거부하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적합한 방식을 찾아가려 애쓰는 것뿐이다. 항상 중요한 건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슬> 때는 모두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도와달라고 했었다면, <하늘의 황금마차>에서는 모두가 창의적으로 즐기면서 작업할 수 없을까 하고 제안해본 거다. 하지만 한두 사람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전체적인, 심지어 공기마저 함께 이해돼야 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전 스탭이 현장에서 창의적으로 움직여주길 바랐는데 많은 이들이 근로자처럼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있더라. 몸에 밴 습관이라 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내 작품을 만드는 거란 공감대, 오랜 기간 함께 작업해온 이들과 공유가 되는 부분을 모든 스탭과 나눌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의욕은 앞서고 통제가 어려울 만큼 사람들은 많고. 자유로움을 취하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연마할 수 있는 시기였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는 말로 들린다. =8월에 촬영마치고 그대로 끝났다면 아무런 공부가 안 됐겠지만 이 작업 자체를 하나의 통과의례로 생각하고 호흡을 길게 가자고 결심했다. 한두 작품 하고 끝낼 것도 아니고 같은 사람들이 노하우를 쌓고 있는 거라서 독감이 오기 전에 미리 먹은 좋은 약으로 생각하고 있다.

-보충촬영 때는 뭐가 달랐나. =10명 미만으로 줄여서 갔다. 첫날 찍으러 갔는데 찍는 데 관심이 없고 슥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더라. 내가 무엇을 원했는가 그제야 보이는 것 같았다. 여름촬영 땐 스탭들에 막혀 현장으로 돌발변수가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하늘의 황금마차>는 그런 통제력이 필요한 영화가 아니다. 엑스트라를 쓰고 싶은 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이 화면 속으로 불쑥 들어와 줬으면 하는 영화다. 경치로 감상되는 제주의 풍광을 보여주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영화다. 그 공간의 공기가 현장으로 들어오는 데까지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작업 방식이나 소재나 기존의 오멸 영화의 연장선에서 자유로운 것 같다. =형식적으로는 <지슬>에서 이어지는 맥락이라기보다는 인권위 프로젝트로 제작된 영화들의 연장선에 있다. 정확히는 인권위 프로젝트 영화들의 맥락에서 벗어난 다른 방식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인권위 영화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너무 사실적이더라. 관객도 불편해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진지함을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이난영 선생의 <하늘의 황금마차>라는 1930년대 노래를 듣고 음악을 중심에 놓은 로드무비를 구상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인권영화 같지 않은 인권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오멸에게 영화란, 영화 만드는 집단이란 어떤 의미인가. =창작은 이미 걸어온 길을 답습하지 않는 거다. 빈 몸으로 동굴에 들어갔을 때 스스로 빛을 발한다면 동굴 내부가 보이고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 그런데 장비가 없다고 동굴 안에 못 들어간다면 곤란하지 않나. 같이 손 잡고 들어가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스스로 빛을 내고자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은 틀에 지나치게 얽매여 만든다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이 사라져버린 느낌이다. 모든 결과물이 좋을 순 없지만 좋은 과정을 터득하는 것이 좋은 결론에 다다르는 기본 자질이라 믿는다. 영화 역시 인생과 같아서 끊임없는 단련이 필요하다. 매일매일이 과정이자 결과다. 지속 가능한 작업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걸음을 멈추지 않을 작가로서의 오멸의 목표가 있다면. =작가가 가장 자주해야 하는 건 배신이다. 자기로부터의 배신, 내가 쌓아온 철학에 대한 배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단어, 문장, 개념적, 정서적인 부분에서 배신을 할 수 있어야 질문과 발견을 할 수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다양성이니 독립이니 하는 단어는 작가가 먼저 생각할 만한 것은 아니지 않나. 많은 작가들이 자기와의 질문 이전에 다양성영화로서, 독립영화로서 하는 식의 틀 안에서 스스로에게 책임감을 불어넣고 한계와 책임을 지정하고 있더라. 예컨대 독립영화라고 말하지만 막상 현장은 어떤가. 모든 조건들이 상업영화의 또 다른 버전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왜 독립영화를 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과 이해가 서로 공유되지 않은 채 시스템에 기대어 관성으로 돌아가는 건 의미가 없다.

-<하늘의 황금마차>에서의 경험을 놓고 볼 때 현장에서의 창의성을 북돋우기 위해서 필요한 건무엇인가. =자유로움.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은 도전, 실험, 그리고 자신을 향한 질문이다. 기왕이면 함께 걸어갈 동료들이 있으면 더 좋고. 나 역시 차기작을 결정할 때마다 향후 1, 2년의 모든 게 결정되는 거니까 신중해진다. 그동안 해왔던 자신 있는 것을 할지 혹은 새로운 것을 할지. 어떤 카드를 꺼낼진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남들이 이름 붙인 호칭에 얽매이진 않으려 한다. 나도 처음엔 외부에서 로컬영화감독이라고 부를 때 거부도 했지만 세상은 정리할 용어가 필요한 거니 어쩌겠나. 다만 틀에 얽매이지 말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내가 지나온 길이 틀이 되지 않을까. 굳이 말하자면 그런 영화집단을 지속하는 게 목표다. 아직 과정에 있지만 그 과정이 즐거운 거다.

-차기작으로 구상 중인 작품은. =서너개 중에 계속 고민 중이었는데 최근에 거의 가닥을 잡았다. 제주 해녀에 관한 이야기다. 밝고 재밌고 친근한 영화가 될 것이다. 정말 재미없는, 나만 좋아하는 영화도 하고 싶지만. (웃음)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만 더 내쉬는 호흡의 영화를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수중촬영 등이 많아서 예산이 필요하긴 한데, 이미 찍을 마음으로 준비 중이다. <지슬> 때도 돈이 있어서 시작한 것은 아니니까. (웃음)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