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 하십니까?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뜨겁다 못해 자칫 데일 정도의 열풍이다. 고려대에서 시작된 대자보가 전국의 대학교, 중/고등학교, 해외 학교, 심지어 시내 전봇대까지 나붙고 있다. 도처의 벽에 대자보가 붙고, 안녕 못하다는 결의의 응답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오프라인의 대자보 하나가 SNS망을 타고 전국에서 각양각색의 언어로 변주되는 이 현기증 나는 속도의 협연, 무척이나 낯설고 신기하다. 유명 아이돌들도 이 열기에 가세하고, 랩으로도 재빠르게 만들어졌다.
놀라워라. 믿기는가, 이 모든 일들이 딱 일주일 만에 일어났다는 게. 아무리 요란한 냄비근성의 한국이라지만 80년대 학생운동의 낡은 오브제인 대자보 두장이 삽시간에 불러들인 이 기이한 열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혹자는 소고기 파동 때와 마찬가지로, 철도 사유화(민영화) 같은 민생 이슈가 대두하면서 등장한 그 유사 경로를 지적하며 ‘촛불세대’에 이은 ‘안녕세대’의 출현을 예고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그동안 승자독식 체계는 그대로 존속시킨 채 자기 계발과 스펙 쌓기만을 강요당해온 청년들의 불만이 대자보라는 상징적 점화를 통해 폭주하게 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겨우 7일 지났다. ‘해석’이란 사건이 끝난 황혼녘에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일 뿐, 진행되는 사건의 에너지와 그 결을 결코 포착하지 못한다. 그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애초의 원본 대자보가 환기시킨 자기 고백과 성찰의 감수성에 대해 수많은 청춘들이 열광적으로 ‘응답’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단정 화법 일색이던 80년대 대자보의 감수성과도 판이하고, 당위의 덫에 빠지지도 않은 채 자기 성찰에 가까운 질문과 응답으로 연결되는 이 대자보 봉화들은 뭔가 다른 힘이 있다.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감성의 정치가 물씬하다.
알량하게나마 양심이 있는 기성세대라면, 이 열풍을 보며 그저 80년대를 추억하거나 ‘일어나라, 젊은이여’ 같은 지겨운 말풍선을 날리는 386 꼰대가 아니라면, 청춘들이 이렇게 때아닌 집단 고백을 하게 만든 사회를 방치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 게 최소한의 양심적 응답일 것이다. 아니면 이참에, 정말로 나는 안녕한가 스스로 질문을 하고 마음속 벽에나마 대자보를 붙여볼 일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들의 삶이 안녕한가를 물어보지 못할 정도로 성찰 능력이 질식된 모래 화석이 아니라면 말이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이 인사말의 정치가 과연 어디까지 확장될지 아무도 모른다. 혹여 찻잔 속 태풍처럼 그냥 가뭇없이 가라앉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치가 퇴행하다 못해 주화입마 상태에 빠져버린 이 불만의 겨울에 “잘 지내니?” 라고 나와 너의 안부를 묻는 이 뜨끈한 인사말이 허연 입김처럼 도처에서 터져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눈물겹다. 사람 사는 동네에 안녕이라는 인사처럼 희망적인 것이 또 어디 있겠나. 모든 대화는 인사로부터 시작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