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스웨덴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 복지 국가’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경제 대공황으로 수많은 실업자들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왔고, 노사 갈등은 극에 달해 파업과 직장 폐쇄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를 해결해야 할 집권세력인 우파(자본주의자들)는 시장에 개입하지 않았고, 반대로 야권인 좌파(마르크스주의자들)는 시장 개입에 주춤했다. 전자는 더 나아지길 기대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고, 후자는 더 나빠지길 기대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이쯤 되면 1930년대 스웨덴이 현재 우리나라와 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시장경제를 맹신하면서 ‘성장’이라는 면만을 추구하는 집권 여당과 그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도 스스로 무언가를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한’ 야당. 물론 이념적인 면에서 당시 스웨덴 정치 지형과는 크게 다르지만 ‘태도’ 면에선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다행히 스웨덴엔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닌 ‘당장 할 수 있는 걸 하려 했던’ 정치인이 있었다. 바로 ‘비그포르스’다. 이를 위해 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한쪽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 대신, 그저 현실에서 당장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의 최대치를 이룰 방법을 찾는다. 그렇게 해서 얻은 답이 ‘산업 현장의 생산성 제고’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공황의 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산업 현장의 생산성 제고’에 동의하는 순간, 노조는 파업을 자제해야 하고 사쪽은 직장 폐쇄를 자제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쪽은 충분한 임금 지급을 약속해야 하고, 노조는 회사 사정에 적합한 임금 인상을 요구해야 한다. 높은 효율성을 보이는 분야엔 민간에 충분한 자율성을 줘도 되지만 낮은 효율성을 보이는 분야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게 정당화된다. 결과만 놓고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적당히 절충한 것 같지만 동기를 보면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기준’이 마련된 것이다.
기존의 기준들과 ‘다른 기준’을 마련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기존의 기준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된 테제’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더이상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새로운 틀 안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혹은 여타 모든 ‘주의’를 흡수해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잠정적 유토피아)라고 하는 모든 ‘주의’들의 근본적인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스스로 ‘테제’가 된 비그포르스와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을 보며 과연 우리나라엔 그런 인물이 누굴까, 생각해봤다. 안타깝게도 서로가 서로의 ‘안티테제’인 인물들과 그들을 통으로 묶어 다시 ‘안티테제’가 되는 인물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안타깝다기보단 비극이다. 비그포르스는 60여년 전 인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