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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고통을 삼키다

고수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 “빨리 (아내를 범죄로 이끈) 그놈을 잡아야 우리 마누라의 혐의가 없어지잖아요. 그 자식이 꼬드겨서 순진한 마누라가 덤터기를 썼는데 아 씨발, 검찰이 그런 것도 몰라!”라고 윽박지르던 종배(고수)는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이야? 마약 나르다 걸린 마누라 데리고 사는 주제에 어디 공공기관에 와서 행패질이야!”라는 수사관의 반격에 이내 후회막급이라는 표정으로 목소리가 잦아든다. 당장이라도 경찰서를 뒤집어엎을 것처럼 난동을 부리던 그는 “죄송합니다. 오해 마시고요, 제가 하도 답답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라며 90도로 고개를 푹 꺾는다. 참 지질하다. 머나먼 타국의 아내와 힘들게 첫 통화를 하게 됐을 때도 ‘괜찮아?’라는 따스한 말 대신 “그러니까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간 거야?”라고 따져 묻기부터 한다. 자신이 친구 보증을 잘못 서서 가세가 기울어 아내가 그런 위험천만한 선택을 했건만 아내 탓만 한다. 역시 지질하다. 이제껏 고수에게서 보지 못한 진짜 보통 한국 남자의 얼굴이 바로 거기 있다.

‘자연스럽게.’ 고수가 <집으로 가는 길>의 종배가 되기 위해 내내 염두에 뒀던 말이다. “종배는 살면서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다. 재판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아내와 딸밖에 모르는 착한 사람이다. 그래서 잘못 보증을 섰다가 그런 처지가 된다. ‘아내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을 실감하는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종배의 고통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평범한 일상의 거대한 파문을 조금씩 자신의 것으로 곱씹어야 하는 사람.” 그 ‘자연스러움’에 대한 것은 그의 가장 큰 숙제였다.

또한 남자 캐릭터이기 때문일까, 방은진 감독도 그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많았다. 방 감독의 전작 <용의자X>(2012)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라면, 어쨌건 <집으로 가는 길>의 종배는 ‘직접 만들고 덧붙여야 하는’ 빈틈이 많았기 때문이다. “‘종배가 혼자 서울에 남아서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라는 감독님의 질문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웃음) 사랑하는 아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고,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될지 내내 고민한다. 그러면서 혼자 아이도 돌봐야 한다. 딴에는 할 만큼 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정말 답답하다. 감옥에 갇혀 지내는 아내만큼이나 답답하다. 더구나 모든 게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미칠 것만 같다. 종배에게는 서울 자체가 거대한 감옥이지 않을까.”

<집으로 가는 길>을 보면서 느끼는 ‘드라마틱한 답답함’은 정연(전도연)과 종배, 양쪽에서 함께 온다. 정연으로부터는 갇혀 지낼 수밖에 없는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그리고 종배로부터는 밉지만 도저히 미워지지 않는 남편이라는 사실에서 그렇다. 혼자 딸을 키우게 되면서 주변 눈치 살피며 딸의 손을 잡고 함께 남탕에도 들어가려 하고, 변호사 비용이 필요하다고 하니 급전을 마련하기 위해 장기밀매 브로커도 만나는 그 ‘안간힘 쓰는’ 모습에서 종배를 마냥 미워하기란 쉽지 않다. “종배 가족이 처한 상황은 우리 사회 극소수의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큰 힘에 눌려 정말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아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것만 같은 상황은 누구나 비일비재하게 겪는다. <집으로 가는 길>은 살면서 한번쯤 겪었을 법한 바로 그 막막함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집으로 가는 길>을 끝내고 TV드라마 <황금의 제국>에 출연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막막함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권력자’ 장태주(고수)가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웃음)”

돌이켜보니 고수는 <집으로 가는 길>이 ‘실화’라는 데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집으로 가는 길>처럼 ‘몰랐던 이야기’와 흔한 위인전처럼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는 두 종류의 실화가 있지만, 양쪽 모두 오히려 배우의 창의성이 녹아들 지점이 많다는 생각에서다. “비슷한 시기 박범신 작가의 <고산자>를 읽으면서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를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느꼈던 고독감, ‘얼마나 다리가 아팠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던 김정호라는 인물의 집념이 묘하게 섞인 것 같다. 어쩌면 그동안 잘 해보지 않았던 사극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맞물린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난 우리나라와 땅을 너무 사랑한다. (웃음)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정호 선생도 얼마나 집으로 가는 길이 그리웠을까. (웃음)” 얼핏 황당한 얘기처럼 느껴졌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배우 고수의 현재 고민과 겹쳐져 놀라운 진실이 숨어 있는 답변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바람처럼 ‘갓 쓴’ 고수의 모습을 조만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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