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소설가란 이름의 인종은, 학교 선생이나 중처럼 끊임없이 인간과 사회를 테마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킬 수 있는 홀가분함 덕분에, 즉 무절제한 사고에 브레이크를 걸 실질적인 체험이 뒷받침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중요한 테마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머지 전혀 실태를 모르는 구석이 있다. 특히 오랜 세월 작가생활을 하거나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예술가라고 믿는 자들 중에 많은 것 같다.”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 <소설가의 각오>에 나오는 말이다. 저 책을 읽었을 때 짐작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뛰어난,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을 쓴 기타노 다케시와 같은 독설능력자다. 그 사실은 이번에 출간된 에세이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 증명된다.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필경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다) 소설 <물의 가족>이나 <천년 동안에>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데, 이쪽이 더 섹시하다. 이것 참 난처한 일 아닌가.
1장의 제목은 ‘부모를 버려라, 그래야 어른이다’다. 그 안의 소제목들은 이런 논리 전개로 이어진다. 부모란 작자들은 한심하다-태어나 보니 지옥 아닌가-별 생각 없이 당신을 낳았다-낳아놓고는 사랑도 안 준다-노후를 위해 당신을 낳은 거다-그러니 당장 집을 나가라-집 안 나가는 자식들은 잘못 키운 벌이다. 독설은 세상의 제도를 만들고 유지하는 모든 정신적, 물리적 형식을 향한다. 가족, 국가, 직장, 신이 그 타깃이다. 심지어, 이 모든 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랑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그것이 사실 남자들에게는 육욕일 뿐이라면서 괜찮은 남자를 건져 팔자를 고쳐보겠다는 여자들의 이해타산이 어떻게 관계를 망치는지 열거한 다음 서른 이후에는 사랑이 어렵다고 일갈한다. 알을 깨고 나오라는 주문을, 품어주는 것으로 대신하는 이들이 많지만 마루야마 겐지는 냅다 집어던져 여기저기 금이 가게 만드는 것으로 해치워버린다. 그러다 탈 난다고? “인생이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