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특별한 아니, 아주 특별한 식사모임이 있었습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이런저런 저녁모임이 많습니다만 정말 특별한 모임이었습니다. 제가 현장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홍콩, 인도 여행서로 유명한 인도환타옹께서 “와 여기 분위기가 완전 양산박이네요”라고 댓글을 남겨주셨더군요. 제 맞은편에는 노지심 선수도 있었으니 맞긴 맞는 말입니다. 11월9일 토요일 등촌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 거구의 사내들이 속속 집결했습니다. 이날의 주인공은 WWA 챔피언 이왕표. 담도암으로 세 군데 병원을 오가며 수차례 수술 끝에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벌인 그가 석달 남짓한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귀환했기에 이를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솔직히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니,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가 프로레슬링에 입문했던 13년 전. 그때 이왕표 회장은 너무 거대해서 일부밖에 보이지 않는 산맥 같은 남자였습니다. 탈아시아급의 하드웨어 스펙. 레전드 김일의 첫 번째 내제자 수련을 통해서 만들어진 전투력까지. 철의 각도로 직립한 어깨와 항공모함처럼 두꺼운 흉위. 거구의 서양 레슬러들도 그 완력과 기술을 버티지 못하고 링 위에서 도미노처럼 무너지곤 했습니다. 공포와 경탄을 동시에 갖고 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 사람과 겸상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야생세계에서 수컷들은 자신보다 강한 수컷을 만나면 고환부터 오그라든다고 하지요. 다른 사람 수컷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확실히 이왕표 회장 앞에선 오그라들었던 것이 맞습니다. 같은 영장류 사람과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한 사람. 하지만 그런 그도 암세포 앞에선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실 앞에서 마주한 그는 제가 알고 있던 그 사람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목에 튜브를 꽂고 누워있는 상태에서 제대로 말도 못하더군요. 왠지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져 돌아오는 버스 창문을 활짝 열고 어떻게든 식히려고 했던 기억이 남니다. 아무튼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 병실 생활 덕분에 온몸을 갑옷처럼 감싸고 있던 근육은 대부분 증발했고 말하는 것조차 힘겨워했습니다. 제가 물을 따라드렸는데 컵을 든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더군요. 힘겨우셨던 겁니다. 앉은자리에서 소주 20병도 마셨다는 거짓말 같은 주량을 자랑했던 분이지만 술은 입에도 못 대고 맹물에 굴비 그리고 흰쌀만 드시더군요. 그것도 백번씩 곱씹어서. 하지만 눈을 통해서 뿜어져나오는 아우라는 여전했습니다. 우린 살면서 많은 불공평한 것을 봅니다. 부와 명예나 직업도 그러하며 심지어 문화예술 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이라면 맨 몸뚱이 하나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만 이미 이름을 알린 부모로부터 인맥과 인지도를 물려받은 2세, 3세들은 몇 발자국 먼저 출발선에서 뛰쳐나갑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세월입니다. 시간입니다. 다시 레슬러 이왕표를 링 위에서 볼 수 있을까요? 아니, 그런 것보다도 어떠한 모습이라도 좋으니까 더 오랫동안 이 세계에 있어주었으면 합니다. 아직 그를 대신하기에 후배들이 너무나 모자랍니다. 슈퍼 드래곤 이왕표. 암과의 승부에서 확실한 승리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인간어뢰 김남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