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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으려는 자가 만든 새로운 콘텐츠
송경원 2013-11-19

<응답하라 1994>를 통해 보는 tvN 드라마의 성공 전략

쓰레기는 빙그레가 듣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슬쩍 가져가 귀에 꽂고는 말한다. “야, 가지가지 한다. 김광석이네? 참 좋은 가수였는데.” 그때 갑자기 한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야, 김광석 아직 안 죽었다~!” 스탭들은 촬영을 멈춘 채 일제히 키득거리고 쓰레기 역의 배우 정우는 머쓱한 미소를 짓는다.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 촬영 현장에서는 모든 스탭들이 스크립터가 된다.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인 만큼 90년대의 정서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게 드라마의 핵심이며, 때문에 전체 배경부터 사소한 소품 하나까지 꼼꼼한 체크는 필수다. 재미있는 건 이런 체크가 현장에서도 수시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스탭들은 현장에서 의견을 내는 것에 그다지 거리낌이 없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틈틈이 의견을 제시하고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화면에 바로 반영한다. 긴장감이 없는 것도 아니고 빡빡한 일정에 피로한 기색도 역력하지만 그 와중에도 다들 현장을 즐기는 분위기. 신촌하숙집의 훈훈하면서도 장난스런 공기는 <응사> 현장의 공기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한 가지 더 있다.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만큼 모두 예민해져 있을 법도 하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그 쌕쌕 음료수 디자인은 그때 거 맞아?” 한창 소품 체크 중인 스탭 옆에서 한 배우가 핀잔을 날린다. “아, 대충 찍어도 시청률 잘 나와. 지금 흐름 탔어.” 그렇다고 대충 찍을 리는 없지만 이 말 한마디에 <응사>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실려 있다. <응사> 미술팀은 음료수 캔을 새로 제작하고 신문 광고에 나온 포스터까지 다시 만들어 붙일 만큼 철저히 당시를 재현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정리된 문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제작진의 기억에 의존해 작업하다보니 놓치는 부분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시청자들은 또 신나서 그 옥에 티들을 깨알같이 잡아낸다. 삐삐의 생산연도가 다르다거나 삼천포가 주문하는 햄버거가 당시에는 출시되지 않은 거라는 등 털면 털수록 나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디테일의 실수가 몰입을 방해하진 않는다. 오히려 시청자들은 당시 자신의 기억과 일일이 비교해가며 틀린그림찾기를 즐긴다. 그렇다. 이건 일종의 게임이다. 시청자들과 제작진이 주고받는 놀이. 놀이는 하나 더 있다. <응사> 전체를 관통하고 이끌어 가는 코드. 과연 나정의 남편은 누구인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예능 드라마

<응사>는 딱 1년 전 <응답하라 1997>(이하 <응칠>)의 패턴을 반복 활용하는 시리즈물이다. 시대를 3년 당겨오고, 빠순이라 불리던 팬덤 문화에서 촌놈들의 시골 상경기로 아이템을 살짝 비틀었을 뿐 전체적인 패턴은 거의 이어받았다. 여주인공의 남편이 누구일까 하는 질문을 큰 틀에 놓고 매 화 에피소드를 통해 각 캐릭터들을 부각시키는 건 당시 <응칠>이 시도했던 새로운 방식의 구성이었다. 각 화의 중심을 잡아주는 내레이션을 줄기로 웃기고 짠한 사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반드시라고 할 만큼 곳곳에 웃음을 박아둔다. 천재 의대생, 대학야구 에이스 등 다소 판타지적인 설정의 캐릭터들이 펼치는 일상은 곧 보는 이의 추억이 된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더라도 한 다리 건너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들이 깨알처럼 모여 모두의 추억으로 바뀌는 보편타당한 체험. 매 화 완결되는 예능을 닮은 드라마가 과연 먹힐까 했지만 <응칠>은 시청자와 교감했고, 한번 했던 패턴이 또 먹히겠냐는 우려를 뚫고 <응사>의 부름에 시청자들은 다시 한번 화답했다.

<응칠>은 기존 공중파 드라마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포맷을 만들어냈다. 기본적으로는 대본을 바탕으로 연기하는 드라마지만, 이야기의 구성방식이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과 매우 닮아 있다. 캐릭터를 구축하고 매 화 에피소드를 반복하며, 공감을 바탕으로 한 깨알 같은 웃음을 날리는 방식은 정확히 리얼 버라이어티의 그것을 닮았다. 다만 <응사>에서는 90년대를 바탕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기본적으로는 작가와 제작진이 예능 출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것들을 익숙한 방식으로 제작하려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하나 어떤 과정으로 탄생했건 중요한 건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도들이 새로운 드라마의 포맷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이 결과물을 보기 위해 일부러 tvN으로 채널을 돌린다. 다시 말하자면 tvN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고유한 콘텐츠가 탄생했다.

드라마가 아니라 tvN 콘텐츠다

<응사> 현장에는 없는 게 많다. 쪽대본이 없고 세트가 없고 톱스타가 없다. 이는 공중파 드라마라면 반드시라고 할 만큼 익숙한 요소들이다. 드라마니까 당연히 세트에서 촬영하고, 시청률을 고려해 당연히 검증된 스타를 쓰려고 애쓰며, 방송국의 촉박한 편성에 맞추다 보니 사전 제작따윈 꿈도 못 꾸고 매번 쪽대본에 허덕인다. 공중파 드라마의 경우 월화, 수목, 주말, 일일드라마의 편성을 기준으로 이미 수백번 답습해온 패턴들 위해서 제작되고 움직인다. 주말드라마, 일일드라마라고 하면 어떤 식으로 진행될 거란 것을 시청자들이 먼저 뇌리에 떠올릴 만큼 익숙한 상황에서 돌아간다. 시스템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이 패턴은 검증되고 안정적인 흐름 위에 있다. 이것은 문제(혹은 경쟁력)이기 이전에 하나의 공고한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효율을 위해 태어나지만 고착화된 이후에는 시스템, 그 자체를 위해 봉사한다. 당연한 일이다. 다만 여기에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새로운 시도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방송국은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드라마를 만들기보다는 시청자들이 길들여져 있는 드라마를 만든다. 굳이 모험을 할 필요도 없고 한다고 해도 최소한으로 족하다.

반면 후발주자이자 케이블 방송인 tvN은 사정이 다르다. 공중파 드라마들과 정면으로 붙어서는 승산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 tvN에 필요한 것은 시청자들을 끌어들일 킬러 콘텐츠지 공중파 드라마와 맞붙어 이길 ‘드라마’가 아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드라마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시청자들을 tvN으로 끌어들일 킬러 콘텐츠가 필요할 뿐이다. 공중파 드라마들은 정해진 패턴에 맞춰 경쟁 채널의 드라마 성격에 맞춰 대응해나갈 필요가 있다. 반면 tvN드라마의 경쟁상대는 공중파 드라마가 아니므로 공중파 드라마의 포맷에 굳이 매달릴 필요가 없다. 이것은 tvN의 불가피한 생존전략인 동시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일단 tvN 드라마들은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편성이 가능하다. 쪽대본이 방송국의 내부 사정, 정치적 결정 등으로 드라마 편성이 늦어지는 탓에 생겨난 악습이라면, tvN 드라마(를 비롯한 여타 프로그램)들은 전체적인 로드맵상의 기획에 맞춰 제작되기 때문에 일찍 편성할 수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사전제작이 가능하다. 물론 막상 촬영이 들어갔을 때의 빡빡한 일정이야 어느 드라마 현장이나 유사하지만 소재와 기획의 방향에 맞춰 구성된다는 점에서 프로그램마다 또렷한 목표, 타깃 시청층, 정체성이 부여된다. 이 같은 기획과 방향의 유연성과 명확성은 tvN 드라마 시간 편성에서도 드러난다. 과감하게 금/토요일에 시간을 편성한 <응사>의 경우 시청자에 기준을 둔 주말드라마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공중파 드라마가 구축한 ‘주말드라마=토/일’이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주 5일 생활 패턴에 맞춘 ‘주말’의 개념에 접근한 것이다. 이는 그간 쌓아온 경험과 검증된 콘텐츠들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결정이지만 먼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미 그 이전에 공중파가 구축해 온 ‘드라마’라는 개념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응사>는 세트 촬영을 하지 않는다. 신원호 PD는 “<응칠> 때는 여건상 세트 촬영이 어려웠지만 이번에는 리얼한 느낌을 주기 위해 일부러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의 말처럼 <응사>의 공간은 기존 드라마에서 보지 못했던 현실적인 질감을 표현해낸다. 처음에는 여건상 ‘어쩔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응칠>을 통해 한 차례 검증된 이후엔 <응사>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위한 선택이 되었다. 새로운 장르는 이렇게 태어난다. <응사>의 대본 회의 역시 1인 작가에 의존하는 기존 드라마와는 달리 집단 회의를 통해 만들어진다. 예능 프로그램 때부터 꾸준히 해오던 방식을 드라마에 고스란히 접목한 것이다. 인과관계를 정확히 하자면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예능의 포맷을 빌려온 것이 아니라 늘 하던 방식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만든 것뿐이다. 여기에 예능이니 드라마니 하는 기존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의미 없다. 현재 tvN이 만들고 있는 것은 공중파를 의식한, 공중파와 경쟁하기 위한 드라마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하이브리드 콘텐츠다.

tvN 브랜드, 그 두 번째 발걸음

현재 tvN 드라마는 크게 내부 인력들이 자체 제작한 드라마들과 외주 업체에 의뢰한 드라마로 나뉜다. 내부적으로 제작하는 드라마들은 <막돼먹은 영애씨>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이 전반적으로 밝고 유쾌한 분위기가 대다수이고 정극 포맷은 주로 외주 업체들이 제작한 경우가 많다. 외주 업체라지만 정확히는 모기업인 CJ E&M에서 기획, 제작한 드라마들이므로 로드맵에 관계없는 드라마가 불쑥 끼어드는 일은 없다. 다만 이 차이는 tvN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데 자체 제작한 드라마들은 대개 예능 출신 PD들의 손에 의해 탄생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상 <롤러코스터> <푸른 거탑> 같은 경우 이 프로그램을 예능으로 봐야 할지 드라마로 봐야 할지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이같은 장르 경계의 모호함이 tvN 드라마의 방향성 중 하나다. 즉, 기존 드라마들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재미있는’ 콘텐츠가 tvN 드라마의 출발점인 셈이다.

따라서 해당 프로그램이 기본적으로 드라마의 포맷을 취하고 있더라도 제작 방식 등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굳이 드라마라는 틀 안에 넣기보다는 tvN이라는 브랜드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게 좀더 정확할 것이다. tvN 드라마가 선보인 과감함과 참신함, 이를테면 장르간 융합이나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과 같은 실험적인 장르드라마 시도는 그에 따른 결과물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려면 반드시 이 채널로 와야 하는 대체 불가능한 즐거움. 즉 드라마간의 경쟁력보다 시청자를 이 채널로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프로그램으로서의 독자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요컨대 tvN 드라마의 신선함은 채널 tvN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의 결과물이다.

시장은 바깥에서부터 변화한다. 1, 2등이 견고한 체계를 다지고 실수를 줄이는 것에 집중하는 사이 바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마련이다. 패러다임이란 그렇게 사소해 보이는 외부의 물결에 의해 일순간 거세게 변화한다. CD가 음반 시장의 주류일 때 디지털 음원은 변두리에 불과했고, 폴더폰이 주류일 땐 아무도 스마트폰을 생각하지 않았다. 시장이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의도가 어떻든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고 새로운 형식으로 완성된 드라마들의 등장은 기존의 공고한 드라마 시장에 변화를 요구한다. 7년째로 접어든 tvN은 그간 다양한 형식의 드라마를 만들어왔고 대중이 기억하는 것 이상으로 무수한 실패를 거쳐왔다. 사람들은 <응답하라> 시리즈나 <막돼먹은 영애씨> 등 성공한 드라마들만 기억하지만 그 몇편의 싹을 틔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필요했는지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스타 PD 영입, 신인 발굴 등 과감한 투자와 실패 끝에 얻어낸 ‘tvN 드라마’라는 브랜드는 이제 새로운 단계로 발을 디디고 있는 중이다. 어렵게 싹 틔운 대표 콘텐츠를 중심에 놓고 시리즈나 스핀오프 등 다양한 확장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이다. <응답하라 1994>는 그 첫 걸음이라 봐도 좋다. 성공한 독자적인 공식 위에 새로운 하나를 추가하는 것, 이는 현재 <응답하라 1994>가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 시장, 아니 방송 콘텐츠 시장의 확장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느리지만 공중파 드라마들도 이러한 시장 변화에 발맞춰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방송 3사가 폐지했던 단막극 드라마를 부활시키고 이를 통한 신인 작가 발굴에 다시 힘을 쏟고 있는 것 역시 그러한 변화의 연장선에 있다. 느린 듯 보여도 순식간에 우리 주변을 에워싸는 변화의 물결, 즐거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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