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줄만 알았던 칠봉이의 역습이 시작됐다. 나정 앞에선 말간 얼굴로 웃기만 하던 칠봉이가 술기운을 빌려 나정에게 입을 맞추는 그때부터, 상황은 역전됐다. 저돌적인 그 입맞춤의 주인공이 유연석이었기에 더 속이 시원했는지도 모른다. 유연석이 <응사>에서 맡은 역할은 93년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서 일곱 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두며 MVP로 뽑혀 ‘휘문고 칠봉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준’이다. 준의 이름은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다.
<건축학개론>의 강남 선배 재욱, <늑대소년>의 얄미운 지태,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의 잔혹한 수행원 지원을 거치며 ‘국민 나쁜놈’ 이미지를 완성한 유연석이 착한 얼굴로 돌아왔다. 악역을 연기할 때 더 빛이 나고, 화제가 되었던 것이 아쉬웠던 걸까. “왜 하필 비호감 캐릭터를 했던 영화만 대박이 터졌는지 모르겠다”며 아이같이 투덜거리는 모습이 덩치에 안 맞게 귀엽기까지 하다. “칠봉이가 실제 모습과 많이 비슷하다”는 유연석에게 “싹싹하고 장난스러운 면도 있다는 걸 이번에야말로 보여주겠다”며 의지를 불태운다.
말끔한 서울 사람 캐릭터를 연기하게 돼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정작 “서울 토박이처럼 구는 게 어색하기만” 하단다. “이우정 작가님과 동향인 경남 진주 출신인데 그걸 모르시고 날 서울 사람으로 캐스팅하신 것 같다. 나야말로 경남 사투리 네이티브다. 사투리를 못하는 척하는 게 훨씬 어렵다. 친구들 앞에서 함부로 서울말 썼다간 닭살 돋는다고 혼난다. (웃음) 내가 사투리를 잘 쓰는 걸 나중에야 아시고 작가님이 무척 아까워하셨다.” 드라마의 절반을 각 지역 사투리가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응사>는 사투리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다. “내가 진짜 촌놈이라 촌놈들과 갭을 느끼는 연기를 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웃음) 그래서인지 촬영장 갈 때마다 고향 사람 만나는 기분이다. 쉬는 시간만 되면 쓰레기 형이랑 사투리로 장난치기 바쁘다.”
유연석에게도 1994년은 남다른 해다. 초등학교 4학년, 학예회에서 연기의 꿈을 틔웠던 때이니 말이다. “남들이 박수를 쳐주는데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고 유연석은 그때를 떠올렸다. “그 뒤로 나설 수 있는 자리는 다 나섰다. 친구들 앞에서 장기자랑도 하고, 오락부장도, 방송반도 했다. 이런 기쁨을 계속 누리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해야 할 게 더 많으니까 절반만 꿈을 이룬 셈이다.” 각종 광고, 예능, 드라마, 시트콤, 영화까지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으면서도 여전히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멀다고 그는 생각한다. “출연작이 많은데 내가 참여한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게 재밌다”는 유연석은 자신의 무색무취한 얼굴이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이제 준의 온전한 이름보다 유연석의 진짜 얼굴이 더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