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겉과 속이 다른 배우라니! 오해는 말자. 11년차 배우 고아라를 향한 순수한 감탄사일 뿐이다. 인형 같은 외모만큼이나 응당 그 속내마저 도도하고 새침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무슨 난데없는 썰렁개그며, 아저씨 같은 추임새인지. <응사>의 나정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털털한 모습이다.
마산에서 상경한 신촌하숙 딸내미 나정은 연세대 농구부 “‘이상민 오빠야’의 극렬 빠순이”다. 강의실 출석보다 체육관 출석에 더 열심인 나정은 어느 순간부터 “머릴 쓰다듬던 (쓰레기) 오빠의 손, 오빠의 숨소리, 오빠의 냄새가 낯설어진다”. 똑같은 ‘순이’지만 <응칠>의 성시원(정은지)과는 여기에서 캐릭터가 확실히 갈린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 사랑을 몰랐던 시원과 달리, 갓 어른의 세계로 접어든 나정은 사랑을 할 줄 아는 것이다. “작가님이 ‘빠순이는 사랑과 순이질을 동시에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더라. 순이질은 사랑보다 더하다고 하셨다. 나정이는 이제 쓰레기의 빠순이가 됐다. 한마디로 쓰·빠~.”
디테일한 생활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강촌에 MT 갔던 에피소드. 쓰레기 오빠의 차를 바라보는 나정의 뒷모습에서 아련함보다 먼저 느껴지는 건 엉덩이가 다 늘어진 ‘추리닝’ 바지다. “함께 연기하는 선배 배우들이 생활 연기의 달인들이다. 특히 정우 오빠, 성동일 선배님의 애드리브에 쉴 새없이 빵빵 터진다. 미니시리즈만 해서 식구 많은 현장이 이렇게 재밌고 좋을 줄 몰랐다.” 1994년, 고아라가 겨우 다섯살이었던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나정은 당시의 분위기에 자연스레 섞여든다. “농구대잔치부터 서태지와 아이들, 유행한 패션과 사회 상황을 미리 알아둬야 할 것 같아 신문 스크랩 파일을 만들어” 예습한 덕이다. “깨알처럼 디테일한 대본 덕에 나정의 1994년이 완성될 수 있었다”고 덧붙이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나정을 연기하기 전까지 고아라는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고 했다. “어느 순간 난 인형이 되어 있더라. 실제의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도시적으로 생긴 것 같지만 출신이 워낙 시골아이라…. (웃음) 촬영 들어가면서 모든 걸 내려놓고 연기에 임했다.” 과연 “모든 걸 내려놓은” 고아라는 걸쭉한 사투리와 괄괄한 성격으로 무장해 나정이 되는 데 완벽하게 성공한다. 경남 진주 출신이긴 해도 “서울 생활한 지 오래돼 처음엔 사투리가 어색했지만” 어느새 “서울말로 쓰인 대사마저도 자연스레 사투리로 읽어버릴 만큼” 사투리가 입에 익었다. 어쨌든 한동안 고아라는 “나정에 빙의해” 다른 생각은 않고 “<응사>의 늪”에만 빠져 허우적댈 모양이다. 그나저나 나정의 남편감은 정말 누구일까. “나도 너무 궁금하다. (갑자기 울먹이는 듯) 끝날 땐 밝혀주실 거죠, 작가님? 안 밝혀지는 거 아니죠? (다시 정색하고) 일단은 어떤 놈이 쓸 만한지 한 번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