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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땅에 발을 딛다

우주의 유토피아에서 대지의 유토피아로

흔히 우주란 과학기술에 의해 열린 새로운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그것이 과연 ‘세계’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반문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은 함께 작업할 때에도 사실은 고립되어 있다.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가 닥터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럭)에게 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고’ 이후다. 사고로 인해 무중력 상태의 공간을 떠돌게 되었을 때, 이러한 고립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런 고립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우주란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세계로부터 절연된 곳이고, 흩어져 존재하는 고립된 자아의 장소라는 사실이다. 우주란 고립된 이들로 구성된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부재, 세계의 상실을 뜻한다. 세계를 상실한 이들의 장소다. 이 영화를 보며 인간(현존재)이란 세계-내-존재임을 강조했던 하이데거를 떠올렸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인간이 갖는 이런 세계-내-존재라는 본질을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연료의 부재로 추진체가 꺼진 상태에서 라이언이 뜻하지 않게 지구상의 누군가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통화하는 장면이다. 지상의 관제센터와의 연결을 포기해야 했던 그 절망적 상황에서 라이언은 라디오 주파수에 실려오는 알아듣지 못하는 이의 음성, 심지어 그 옆에서 개 짖는 소리에 감응한다. 스스로 개 짖는 소리를 내면서 그가 흘리는 눈물은 세계상실의 상황에서 자신이 살던 세계에 대한 그리움에 기인하는 것일 거다.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이처럼 다른 누군가와 접속하고 이어지는 것이고, 그의 언행에 감응하며 반응하는 것이며, 그런 방식으로 함께 속한 하나의 세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역으로 세계로부터 절연된 상태의 인간은 살아 있다고, 아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이다. 세계와의 모든 관계가 절단된 데카르트적인 자아란 우주공간에 홀로 고립된 단 한 사람으로서의 인간처럼, 사실상 있을 수 없으며, 있어도 산다고 할 수 없는 그런 상태다.

‘고향상실’의 부메랑

이 영화에서 라이언이 살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은 다른 사람과 연결을 회복하려는 장면들이다. 우주선 파편의 충격으로 튕겨져나간 라이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동료나 지구상의 본부와 교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구원’의 순간은 동료인 맷이 찾아와 손을 내밀어줄 때이다. 둘이 함께 우주정거장 ISS를 향해 날아갈 때, 맷은 끊임없이 라이언에게 말을 걸고 말하게 한다. 라이언이 자신마저 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어져가는 맷의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살아남는 것이 함께 죽는 것만 못한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사실 사고 이전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말한다. 휴스턴과, 혹은 우주선의 동료들과. 블랑쇼라면, 우주인이란 ‘끊임없이 말하는 존재’라고 정의할지도 모른다. “저기 저곳에서 바깥의 인간은 끊임없이 말하고 또 말해야만 했다… 그 끊임없는 말만이 그 자신을 예전의 ‘장소’와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였기 때문이다.”

말뿐 아니라, 연계를 만들어주는 ‘물질적’인 끈들 또한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라이언과 맷을 연결해주는 끈, 우주선과 라이언의 몸을 연결해주는 끈이 그렇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또 하나는 사람들과의 연계뿐만 아니라 사물들과의 연계 또한 생존 혹은 삶의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이다. 고립과 대비되는 세계성, 거기에는 사물들과의 연계 또한 필수적인 요건인 것이다. 홀로 남은 라이언을 생존으로 인도하는 것, 그것은 그와 끈으로 이어진 사물들이었다.

하이데거는 이런 세계성을 ‘고향’으로 영토화한다. 고향으로서의 세계, 저기 숲이 있고 땅과 하늘이 있고, 가족 같은 이웃들이 있는 곳이며, 내가 정붙이고 사는 동물이나 사물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다. 집이나 마을 어귀의 큰 느티나무에 깃든 신들이, 토지에 깃든 신들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다. 세계란 그저 사람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어떤 공간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이처럼 의미를 공유하며 하나로 어우러져 사는 특정한 장소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근대산업이 주도하여 만들어낸 근대세계는 자연과 인간의 공동체인 이 고향을 파괴해버렸고, 이런저런 이유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세계성이 해체되며 상실될 위험을 뜻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고향상실’이라고 명명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을 덮쳐온 재난, 그것은 무엇보다 세계성의 파괴를 뜻한다는 점에서 ‘고향상실’의 사태를 표현한다 할 것이다. 그 재난은 우주에 쏘아올린 위성이나 우주선들의 잔해, 이른바 ‘우주쓰레기’들이 덮쳐오는 것이란 점에서 첨단적 과학기술 자신의 업화가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이다. 하이데거라면 자연과 우주에 대해 존재의 의미를 닦달하여 얻어낸 계산과 통제의 능력이 인간 자신마저 계산과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사태의 한 단면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인간의 터전으로의 회귀

이를 통해 이 영화는, ‘우주정복’의 실험이 시작된 시기에 하이데거를 겨냥한 블랑쇼의 글에 대해 50년 만에 반박을 하고 있다. 50여년 전, 소련 우주선이 유리 가가린을 태우고 우주에 처음 올라갔을 때, 블랑쇼는 이 실험의 진정한 의의는 바로 인간이 자신의 터와 단절했다는 사실에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인간을 자신의 장소성과 분리함으로써 얻어진 이 자유는 “정착문명을 흔들고, 인간의 특이성을 와해시키고, 인간을 유년의 유토피아(우리 안의 유아-인간이 터전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의미에서) 바깥으로 인도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라고 하면서. 물론 블랑쇼가 순진한 찬사만 늘어놓았을 리는 없다. 지구라는 터로부터 벗어났지만 가가린은 어느 누구보다 더 철저하게 상황의 포로였으며,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존재들 가운데 가장 둔중했다고 지적한다.

이 영화는 블랑쇼가 말한 이 둔중함과 포로적인 상태를 아주 잘 보여준다. 무중력의 우주를 유영하지만 누구보다도 상황의 포로였고, 특별한 장비나 연료가 없으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한 둔중함. 재난으로 인해 그 한계가 극단화되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 단절하며 떠나갔던 터, 지구의 대지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블랑쇼가 본 것과 반대의 궤적을 그린다. 이 되돌아감은 우주선이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가는 단순한 귀환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터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으로, 떠나버렸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라이언이 호수 속에서 기어 도착한 대지에 엎드린 모습은 대지에 입맞춤하는 모습과 가깝다. 그 장면을 주어를 바꾸어 표현하면, 대지가 떠났던 그를 안으며 받아주는 것이 될 터이다. 일어서서 걷는 그의 걸음이 비틀거리는 것은, 막 걸음을 걷기 시작한 아기의 걸음과 유사하다. 블랑쇼가 ‘유년의 유토피아’라고 명명했던, 인간이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기원적 회귀.

우주정복, 혹은 우주여행이 인간의 유토피아였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우주에서의 재난을 다룬 이 영화는 이제 그 유토피아가 다른 모든 유토피아들처럼 사실은 디스토피아의 일종이었음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면서 우주의 유토피아로부터 다시금 대지의 유토피아로 되돌아가자고 하려는 것 같다. 사람들이 이에 동의할 것인가의 여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대지와 우주를 왕복하는 유토피아가 하나의 순환을 끝냈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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