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술자리, 작은 입씨름이 벌어졌다. “너 꼰대 같아.” “내가 무슨… 꼰대는 너지.” 서로를 꼰대라 부르며 극구 자신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이 야릇한 입씨름의 주인공은 40대 영화인들이었다.
자신이 꼰대임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아예 꼰대라는 말을 훈장처럼 여기는 꽤 나이 든 어르신들을 제외한다면, 중/장년층은 ‘꼰대’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뜨거운 주홍글씨로 여기는 요즘 풍경이다. 청춘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중/장년층도 자신이 꼰대로 몰릴까 노심초사한다. 나 같은 경우 나에게서 행여나 꼰대 냄새가 날까봐 킁킁거리며 꼰대 탐지기를 24시간 가동하기도 한다. “내가 꼰대처럼 보이니?”
이반 일리치는 유행하는 키워드를 보면 세상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요즘 한국의 키워드는 ‘속물’, ‘잉여’, 그리고 ‘꼰대’다. 속물과 잉여는 체제 안에 포섭되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에 따라 나뉘는 욕망의 대립각이다. 한쪽에선 자동차, 아파트, 주식으로 표상되는 속물들의 나라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속물들에게 기생하며 삶을 유지하지만 체제에 포섭되지 못한 채 인터넷의 바다에 쓸려다니는 잉여들의 나라가 있다.
속물과 잉여를 배출한 게 ‘삶의 형식’이라면, 꼰대는 ‘삶의 태도’에서 유래한다. 꼰대는 나이가 들었다고 자동 생성되는 버그가 아니다. 굳이 찾자면 선생이나 부모를 지칭하던 전라도 사투리에서 꼰대의 어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요즘의 꼰대는 잔소리의 영역을 넘어 오지랖과 간섭, 특정 가치관과 행동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향해진다.
그러나 사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리바이’를 만들면서 나이가 든다. 나이듦은 알리바이의 무덤이다. 꼰대들이란 실패했든 성공했든 자기 생을 적극 긍정하기 위해 알리바이를 동원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타인에게 강요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다. 알리바이를 내세우지 않는 꼰대란 없다. 가령, 이명박 전 대통령의 그 지겨운 ‘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수사를 보라. 모든 꼰대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알리바이의 전형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제2 새마을운동’ 역시 ‘우리 아버지가 해봐서 아는데’의 클리셰다. 이들과 대척된 야당 정치인들도 알리바이를 만드는 재주 빼놓고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데서 꼰대의 대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찌 보면 꼰대가 이렇게 도마 위에 올려져 조롱거리가 된 건 민주화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전근대 사회와 군부 체제에서 일방통행되던 ‘권위’ 문화에 대한 반발이 일상생활에까지 스며들어 그 견딜 수 없는 질곡의 관계에 대한 크고 작은 고발들이 이루어지는 건지도.
하지만 나는 꼰대가 아닌가? 당신은? 굳이 알리바이를 쌓아올리지도 않고, 실수투성이의 삶을 구구절절 변명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있는가? 자신이 없다. ‘어른’이 되는 법을 상실한 채 속물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혹시 서로를 꼰대라고 고발하며 그렇게 속물로 숙성되고 있는 건 아닐까? 늙은 속물만 넘쳐나는 이 나라엔 ‘어른’이 없다. 속물의 자리만 남겨놓고 나이듦의 여정을 생략해버린 사회에선 누구나 꼰대가 된다. 생의 알리바이가 비루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