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발표할 새 앨범 관계로 마음이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12월부터 전국 투어도 있어 여러모로 설레는 날들이다. 새롭게 세상에 내놓는 작은 세계가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떨린다. 마음이 내내 붕 떠 있는 그런 밤,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번호 표시제한’이라는 문구. 보통 이런 전화는 받지 않지만 왠지 느낌이 달랐다.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숨소리만 작게 들린다. 몇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입을 떼었다. “혜원씨?” “….” “혜원씨 맞죠? 지금 어디예요?” “전 줄 어떻게 아셨어요?” “몰라요. 그냥 그럴 것 같아서. 어디로 사라진 거예요? 외국이라도 간 건가요?” “아주 멀리 있어요.” “왜 태일이한테 아무 말도 없이 없어진 거죠? 태일이가 거의 폐인이 됐어요.” “상관없어요. 그 오빠 금방 다시 살아날 거예요.”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고요?” “나, 우주에 있어요. 깜깜한 우주공간.”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 친구가 모종의 충격으로 정신이 나갔나. “바로 앞에 커다란 지구가 보여요. 지금 한반도 상공을 지나고 있어요. 멀리 저기 땅 위에 이적 오빠가 있다는 생각에 전화했어요. 나를 구해줄래요?” “영화 봤군요? <그래비티>?” “나는 예전부터 연락이 두절된 채 버려져 있었나 봐요. 그걸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에요.” “하… 저도 그 영화 봤어요. 같이 우주공간에 있었던 기분이 들죠. 3D 아이맥스 극장에서 보고 나왔더니 다리가 휘청거리더라고요. 엄청난 체험이에요. 영화라기보다는 테마파크의 어트랙션, 탈것 같았어요. 많은 것에 대해 묵상하게 하는.” “이적 오빠가 개를 키웠으면 좋았을 텐데. 개 짖는 소리에 위로를 받게.” “우리는 말이 통하잖아요.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족이 아니에요, 난.” “나 이 통화 하면서 산소 농도를 낮출지도 몰라요. 그럼 오빠가 제 곁에 나타날 것 같아요. 조지 클루니처럼.” “술 마셨어요, 혹시? 무서운 얘기는 하지 말아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달려갈 수도 없으니까.” “술 조금 마셨어요. 사실은 마시고 있어요. 마시지 않았다면 이 전화도 걸지 않았겠죠. 내일 아침에 통화내역을 보고 엄청 후회할 거예요. 난 그냥 사라지고 싶었는데.” “무슨 할 얘기 있어요? 태일이가 어떤 잘못을 한 거죠? 아니면 내가 뭔가 실수했나요?” “실수는 모두 했죠. 몇번씩. 사이좋게 골고루.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결국 난 모든 게 끊긴 채 돌아갈 희망도 없이 당신들 주변을 뱅뱅 돌고 있었을 뿐이니까. 고장난 위성처럼.” 그녀의 혀가 꼬여 있다. 한편으로는 약간 지겨워지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전화를 끊어버리면 그녀는 정말 영영 우주공간 저편으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별 볼일 없는 나랑 태일이 따위는 지구가 아니에요. 쓰레기 운석 정도지. 튼튼한 중력으로 혜원씨를 붙잡아줄 누군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요. 다 어린 날의 얄궂은 가슴 떨림에 불과하다니까요.” “전에 <그런 걸까>라는 노래 얘기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 노래 찾아 들어봤어요. 2절 가사 생각나요? ‘어린 날 사랑은 철없는 추억인 걸까, 그런 걸까, 그런 걸까, 끝내 어른스레 서로를 보내야 할까, 그런 걸까, 왜 그런 걸까….’” 노래하던 목소리가 점점 울먹인다. 술 취한 여대생이 부르는 내 노래를 전화상에서 듣는 것은 정말 기이한 경험이다. 난 아무 말 없이 흐느낌이 끝나길 기다린다. “근데 오빠, 우주에는 공기가 없어서 소리가 안 난대요.” “그래요, 영화에서도 우주공간은 폭발의 순간에조차 고요하더군요.” “그럼 음악은 우주적인 현상이 아닌가 봐요.” “네?” “우주에서는 음악을 들려줄 방법이 없잖아요.” “대기가 있는 행성이나 우주선 안이라야 가능하겠죠.” “그러고 보면 음악은 지구인들의 발명품일까요?” “문명을 가진 외계인들은 나름의 음악을 갖고 있을 것도 같지만.” “우주에서 누굴 만나도 그림은 보여줄 수 있는데 이적 오빠 노래는 못 들려준다는 게 슬프지 않아요?” “글쎄요. 그렇게 덧없는 게 때론 더 아름다워 보이기도 해요. 어느 순간 완벽히 사라지니까.” “완벽히… 사라진다고요?” “어차피 노래라는 건 부르고 나면 사라지잖아요. 방금 혜원씨가 부른 <그런 걸까>도 어느 틈에 완벽히 사라졌네요. 우리 둘 말고는 그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조차, 혜원씨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는 것조차 아무도 모르는 채로.” “이런 얘기를 오빠가 하니까 내가 힘들지.” “네?” “그래요.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세상엔 참 많아요.” “혜원씨는 돌아와요. 태일이한테 이별통보라도 정식으로 해야죠.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잠수타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죠. 너무 가혹하잖아요.” “오빠가 대신 전해주세요. 나 찾지 말라고.” “혜원씨가 저한테 전화했다고 어떻게 얘기를 합니까, 태일이한테. 가뜩이나 의심이 가득한 친구인데.” “그래요? 눈치는 있네.” “무슨 소리예요?” “비겁해요, 이적 오빠도. 치사하고, 비겁해.” “술 너무 많이 마신 거 같은데요?” “나 깜깜한 우주공간 속으로 떠나려 해요. 우주유영 신기록을 세울지도 몰라요.” “혜원씨, 끊지 말아요. 지금 어디예요? 내가 갈게요. 서울이 아닌가요?” “안녕.” 전화가 끊어졌다.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다시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다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차가워진 밤공기를 맞으며 힘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저 멀리 별들 사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으로 그녀가 사라져간다. 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적표현물]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다면
글
이적(가수)
일러스트레이션
아방(일러스트레이터)
2013-10-28
시즌1을 마치며, <그래비티>와 감정의 중력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