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영화와 건축을 묶어 설명하려는 목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둘 다 공간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당연하고도 흥미로운 조합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은 정재은 감독의 <말하는 건축가>였다. 이제는 건축 전문 다큐멘터리스트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재은 감독이 또 한번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신작 <말하는 건축 시티:홀>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울시청이 지어진 과정을 가감 없이 따라간다. <말하는 건축가>가 고 정기용 건축가를 중심에 놓고 조각해낸 따스한 관찰이었다면 <말하는 건축 시티:홀>은 서울시청이 주인공인 그야말로 ‘건축’에 대한 이야기다. 건축을 하나의 문화로 바라볼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인식을 좀더 넓히고 싶었다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
-벌써 건축다큐멘터리만 두편째다. 이러다가 건축 전문가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겨우 영화 두편으로 어떻게 전문가가 되겠나. (웃음) 계속 하다보니 내가 알고 싶고 궁금해하던 걸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분야를 한 단계만 넘어가도 서로를 너무 모르는 것 같다. 건축 역시 일상인데 마치 일부 엘리트들의 전유물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양쪽을 모두 경험했는데 영화계와 건축쪽 사람들의 차이가 크던가. =확실히 다른 점은 영화가 연예산업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배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산업이다. 마케팅 방식도 마찬가지고. 건축 분야에서는 아직 대중적으로 이렇다 할 스타들이 없다. 내부적으로 전문가들끼리는 유명해도 일반인에게는 전혀 생소한 세계다. 해외에선 건축계의 유명 인사가 연예인 이상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건축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연이어 연출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건가. =가령 해외에서는 빌딩도 하나의 미디어로 바라본다. 영화, 방송, 프로그램만이 미디어가 아니다. 건축을 미디어, 그러니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도심 속 건물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고 사람들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내 영화들이 건축이라는 미디어를 영화라는 미디어에 실어 소통하며 알려나간다는 기쁨이 있다.
-‘말하는 건축’ 다큐 시리즈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고 싶은 생각인 건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즐겁겠지만. (웃음) 우선은 건축적인 인식을 확산시키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에 대한 관심,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애정, 이런 생각들이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정치적 비판은 내 역할 아니다
-애초에 건축다큐멘터리에 빠지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영화를 만들다보니 기본적으로 공간에 대한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공간이 화면의 주인공처럼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고 어쩌면 배우들이 그런 부분에서 불만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웃음) 그런 관심들이 점점 구체화되고 많아지면서 다큐멘터리의 주제로 자연스럽게 건축을 선택한 것 같다. 굳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지 하는 목적으로 소재를 찾아 접근한 건 아니다. 말하고 싶은 소재와 필요한 이야기 방식이 동시에 자연스럽게 결합했다고 할까.
-<말하는 건축 시티:홀>은 전편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말하는 건축가>가 고 정기용 선생의 건축세계를 탐구하는 전기 같다면 이번에는 서울시청이 만들어지는 제작과정을 성실하게 담아낸 기록물 같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번 영화가 내가 꿈꾸는 다큐멘터리쪽에 좀더 가깝다. <말하는 건축가> 때도 나름 균형을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사람이란 게 죽음 앞에서는 약해지기 마련이더라. 아무래도 선생님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많이 녹아들어가 있다. 반면 이번에는 서울시청의 건축과정을 통해 건축이란 것이 사회 전체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리고 싶었다. 공공건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나름 굉장히 큰 그림을 구상하면서 내린 결정이다.
-막상 영화를 보면 기대와는 다르게 비판적인 질문들이 많이 깎여나간 느낌이다. =대체 무슨 기대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다. (웃음) 사실 사람들이 서울시청을 다 싫어하지 않나. 그렇게까지 싫어하니까 다들 왜 이 주인공(시청)을 그렇게 싫어할까, 도대체 어떤 점이 싫은 걸까 하고 이해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공공건축 건설을 발주한 시장이 미워서? 시청 자체의 이야기보다 정치적 인식 때문에 더 부정적인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영화에는 시청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만을 담았다. 서울시청이 지어진 과정을 아는 것 자체가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를 찍는 것은 결국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일례로 이완용에 대한 다큐를 찍는다고 해도 과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보는 내내 뭔가를 기대하게 되더라. 이쯤에서 비판이 나오겠지 하는 식으로. 굳이 비유하자면 액션영화를 보러갔는데 멜로가 나온 느낌이었다. =서울시청에 대한 문제 지적이 필요했다면 그건 내 의도도, 역할도 아니다. 비판이나 고발을 통해 일방적으로 내 의견을 전달하고 싶진 않았다. 막연하게 혹은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편견을 거두고 성숙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한편으론 나도 막연한 편견 속에서 쉽게 결론내리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반성이 됐다. =정말 악인이 하나 있어 책임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권력자 한 사람이 잘못해서 나쁜 결과가 나오는 사회는 이미 지난 것 같다. 막말로 오세훈 전 시장 한명을 몰아세우고 미워하면 그걸로 끝인가? 마음은 편하겠지만 절대로 그건 아니다. 어떤 결과란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가 배경을 삼고 있는 조직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직능과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런 논리라면 서울시청에 무관심한 일반인이 모두 악인일 것이다. 누가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떤 과정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말하는 건축 시티:홀>은 확실히 과정의 이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보인다. 특히 ‘턴키(행정 편의를 위해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발주, 일괄 계약하는 방식)’ 같은 전문용어가 수시로 나오는데도 의외로 어렵지 않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서울시청 건설은 무려 7년이 걸렸지만 그 과정 전체를 찍은 건 아니다. 실체 촬영은 1년 정도, 이후 편집에 1년 정도가 걸렸다. 하지만 관련자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건축과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된 건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자기가 맡은 파트에서만 일하기 때문에 이 모자이크의 전체 그림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 제일 오래 근무한 핵심 멤버는 감리단장, 서울시 주무관, 시공사인 삼성물산 팀장 정도인데 대략 3년에서 5년가량 일했다고 보면 된다.
-그러고보니 영화작업이랑 건축과정이랑 정말 비슷하더라. 회의 때마다 피 터지게 싸우는 거나 각기 다른 파트의 의견을 조율해나가며 작업이 진행되는 거나. =실제로 영화작업과 과정이 매우 비슷해서 배우는 게 많다. 내가 영화 만들면서 고민했던 부분들이 영화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결국 사회의 전체적인 변화의 여정 중에 있는 거구나라고 매번 느끼고 위로받는다. 예를 들자면 설계자를 일방적으로 배제한 채 시공업체에서 작업과정을 주도한다든지…. 최근 영화계 상황과 비슷하지 않은가? (웃음)
-정치적인 비판으로 접근하지 않으려고 했다고는 하지만 건설과정을 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책임지는 사람이나 지휘하는 사람 없이 실무자들끼리 머리 싸매고 현장을 수습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오래 함께한 담당 실무자들의 모습을 영화에 담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사실 오랜 시간 지켜보며 마음이 아팠다. 건축물의 호불호를 떠나 더 좋은 걸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에 아쉽고 애틋하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더 많이 알고 있었다면 더 좋은 건축물이 나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령 서울청사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들에게 반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디자인은 무엇인가. 함께하는 고민과 관심이 필요하다. 게다가 영화에 나온 다른 디자인 중에는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나. 다른 디자인과 비교해보면 지금의 청사 디자인이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주관식과 객관식의 차이랄까? 확실히 다른 디자인들을 보고 나니 변명까지는 아니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은 된 것 같다. =그런 게 다큐멘터리의 본질 아닐까.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약자를 돌보는 다큐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고 이해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이해를 시킨다’는 관점에서 볼 때 극영화의 경험이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도 같다.
-건축가 유걸 선생님도 언론에는 일방적으로 배제되어 억울해한다는 식으로만 나왔었는데 막상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실무자들과 사이도 좋아 보이고. =영화작업과 비교해서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시나리오를 썼는데 연출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뒤에 가서 편집이랑 후반작업에만 조금 참여했다 치자.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도 작품 전체를 부정하고 싶진 않을 것 같다. 아이디어 자체는 나에게서 나온 거니까. 유걸 건축가도 디테일한 변경은 있어도 원래의 의도는 살아남아 있다고 했다. 심경이야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겠지만 그래도 영화로 기록이 되어 너무 좋다고,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이해하게 되길 바란다고 하더라.
-중간중간 상황이나 심리를 설명해주는 인서트컷이라든지 배경음악 등의 사용이 적절했던 것 같다. 대개 정통 다큐멘터리스트들은 그런 연출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에 비해 <말하는 건축 시티:홀>은 한결 쉽고 편하고 설득력 있다. =어떻게 보면 더 영화적인 느낌으로 다가가기 위한 거다. 새로운 정보와 낯선 세계를 보여주는 만큼 감정적인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었다. 내 의견을 주장하고 싶진 않았지만 정서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감정은 있었다. 예를 들어 서울 광장의 풍경은 그게 곧 서울의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주 넣었다. 매일 촬영은 하는데 뭔가 눈에 띄게 변하는 것 같지도 않고 너무 지겨워서 주위를 둘러보다 마침 딱 맞는 소품이 보여서 그대로 찍은 장면들도 있다. 말 장난감이 쳇바퀴를 도는 장면인데 다소 인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우겨서 넣었다. 전체적으로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다시 극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나. =당연히 만들고 싶다! 연출 제의가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지. (웃음) 사실 다큐 작업은 돈은 안되고 일은 많고 힘들다. 그래도 호기심이 많아서인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기쁨이 있다. 극영화에서는 느끼기 힘든 경험이다. 우리나라는 다큐멘터리 하면 정치 비판하는 좌파들이 만드는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시장 자체가 경직화된 경향이 있다. 좀더 다양한 방식과 소재의 다큐멘터리들이 제작될 필요가 있다. 외국처럼 다큐와 극을 넘나들면서 다양하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이젠 극영화를 한편 해보고 싶다. 전에 썼던 시나리오들 다시 정리하고 있는데, 만약 투자가 안되면 다시 다큐멘터리 찍고. (웃음)
-이미 염두에 둔 다큐멘터리 주제가 있는 것 같다. =어떤 걸 먼저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날 지경이다. (웃음) 이야기를 할수록 점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진다. 아마도 도시의 모든 빌딩들이 시청과 비슷한 악순환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걸 좀더 확장해 수도권 주변의 신도시들의 형성과정을 되짚어보는 중장기 프로젝트도 생각 중이다. 집 근처에 간송미술관이 있는데 간송 전형필 선생의 컬렉터적인 면모를 조명하는 인물 다큐도 한번 해보고 싶다. ‘말하는 건축’을 굳이 시리즈화하자면 마지막은 건축가 고 김수근 선생에 대해 다뤄보고 싶다. 말년에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김수근 선생의 이야기를 따라가볼까 한다. 가제는 <말없는 건축가>라고 하면 적절할까? 영화적인 시퀀스들이 더 많이 있는 다큐가 되지 않을까 싶어 흥미롭다.
-해야 할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데 극영화 할 수 있을까. =내 말이!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