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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이별 인사
김진혁(연출)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3-10-25

EBS를 떠난 지도 어느덧 3개월이 훌쩍 지났다. 11여년을 다니던 직장이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일들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게 뭔가 미안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찰나, 야밤에 갑자기 후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진혁 선배, 술 한잔하러 나와요!”

만나고 나니 서글픔은 기우였다. 후배들과 잡담을 나누자마자 난 어느덧 EBS PD가 되어 있었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EBS에 대한 여러 가지 시시콜콜한 것들을 청산유수로 후배들에게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내가 만들던 <다큐프라임-나는 독립유공자 후손입니다> 불방과 관련해서 항의의 의미로 피켓 시위를 했던 EBS 선후배 동료 PD들이 징계를 받았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징계의 사유인즉 외부 강연과 관련하여 사전에 회사쪽에 미리 신고를 하지 않아서란다. 사실 그 부분이라고 하면 나 역시 제대로 신고를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아마도 외부 강연의 경우 내가 EBS에서 가장 많이 한 축에 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외부 강연을 가지고 걸고넘어진 건 사실 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로 인해 애꿎은 선후배 동료들이 징계를 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규정을 지키지 않았으니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나 역시 EBS에 계속 있었으면 징계를 받았을 것이고, 또 그 자체에 대해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현상’과 함께 그 현상 뒤에는 항상 연결된 ‘맥락’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 ‘맥락’이란 면에서 살펴보면 ‘괘씸죄’라는 의도가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만들다 중단됐던 다큐멘터리의 주요 소재는 ‘반민특위’였다. 불방 당시만 해도 역사교과서에도 버젓이 등장하는 이 소재를 왜 굳이, 그리고 내용도 교과서 수준인,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인 이 소재를 그토록 불방시키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최근 식민사관 교과서 논란을 비롯한 ‘역사 전쟁’을 보니 전체적인 맥락이 이해가 됐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우스갯소리로 그런 얘길했다. “야, 이렇게 역사 가지고 난리가 날 줄 알았다면 내가 역사를 소재로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했을까?”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가 오갔다.

나로 인해 발생한 큰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EBS, 그곳에 남겨진 선후배 동료들에게 혼자 살아보겠다고 떠나버린 전직 EBS 동료 PD가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죄송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결코 EBS를 잊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