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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이해한 소설가
배창호(영화감독) 2013-10-15

배창호 감독이 회상한 ‘최인호 형과의 작업’

<깊고 푸른 밤>

1982년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의 성공에 이어 <철인들>의 대종상 작품상 수상으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나는 다음해 10여개 영화사의 연출 의뢰를 모두 사양한 채 당시 여러 감독들의 경합이 붙어 있던 소설 <적도의 꽃>을 세 번째 작품으로 하고 싶었다. 충무로 지하 다방에서 원작자인 최인호 형을 만나 작품에 대한 내 열정을 보이자 형은 “네 기세가 만만치 않으니 허락할 수밖에 없다”며 나와 의기투합하였다. 도시의 아파트 문화로 확산된 소통 부재와 익명성의 시대에 미스터 M이라는 남자의 편집증적 사랑의 파멸을 그린 <적도의 꽃>은 평단의 지지를 받으며 그해 흥행 1위를 하였고 잇따라 형과 함께 <고래사냥>을 만들었다. 실어증에 걸린 창녀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아웃사이더들의 여정을 그린 이 로드무비는 당시 군사정권의 억압적 시대 분위기가 무거운 공기처럼 깔려 있던 답답한 시대에 많은 젊은이들의 해방구가 되어주었다. 1985년 나는 인호 형의 <깊고 푸른 밤>을 만들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동명 소설이 아닌 형의 다른 소설 <물 위의 사막>이었는데 제목은 ‘깊고 푸른 밤’으로 하여 영화로 새롭게 태어난 작품이었다. 아메리칸드림의 허상과 이기적인 욕망의 비극적 스토리를 미국 올 로케이션으로 찍은 이 작품은 국내 관객뿐 아니라 일본, 홍콩을 비롯한 해외 관객도 놀라게 하였다. 지금은 해외 영화제의 수상이 흔한 시절이지만 당시에는 23년 만에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했고 인호 형은 같은 영화제의 각본상을 받았다. 나는 연속적인 성공으로 자만에 빠지게 되었다. 형과의 <고래사냥> 2편 시나리오 작업은 초심을 잃은 나로 인하여 서둘러 끝났고 비록 흥행엔 성공했지만 나 스스로 실패작임을 인정하였다. 나는 이 실패를 예술로서의 영화의 역할을 깊이 성찰하는 뼈아픈 기회로 삼았고 그 뒤 인호 형의 중편소설 <황진이>의 영화화를 의욕적으로 착수했다. 완성된 시나리오는 조선시대 초기의 실존 인물 황진이의 일생을 탐미적인 스타일로 담은 것이었는데 촬영 과정에서 시나리오의 극적인 일화들을 배제하고 정중동의 담백한 화면을 구사했다. 영화와 소설은 다른 매체이므로 시나리오는 원작으로부터 덩어리를 빌릴 뿐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닌 인호 형이었지만 절반쯤 찍은 러시필름을 보고는 당황하였다. 과즙이 풍성해야 맛이 있는 과일이 되는 법인데 이 영화는 어딘지 육(肉)이 부족하고 기(氣)만 많이 느껴진다고 걱정을 내비쳤다. 그러나 몇 달 뒤 완성된 영화를 보고는 당시 영화계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던 나를 새롭고 품위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며 옹호해주었다. 다음해 <안녕하세요 하나님>이라는 형의 다른 원작의 제목을 빌려 지체부자유 청년의 여행을 통해 인생을 비유하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함께 썼고 얼마 뒤 인호 형은 이 영화 제목처럼 하나님께 인사드리며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1991년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인호 형이 70년대에 쓴 <천국의 계단>이라는 대중적인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했다. 이 소설의 스토리는 베트남전에 파병 뒤 실종된 애인의 아이를 낳고 미혼모가 되었으나 출세하기 위해 타락하고 거짓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여배우의 인생 역정을 그린 고전적인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스타라는 명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언니의 아이로 위장하다가 언론의 추적이 시작되자 아이를 시골로 은닉하는데 형과 나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며칠간 고민하였다. 원작의 내용대로 여배우의 아이를 사고로 죽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결국 형과 나는 아이의 죽음은 여배우의 거짓된 삶의 대가로 스스로 초래한 결과이며, 아이의 죽음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스타의 신분을 버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라스트신에서 새 생명을 임신한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작가와 감독으로서 의견의 일치를 보며 서로 기뻐했다.

작가는 글의 신성한 의무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던 인호 형은 50년 동안 많은 작품을 이 땅에 남기고 이제 천국을 향해 떠났다. 지난 9월28일 영결 미사가 진행되는 명동성당 안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며 형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했다. 형 고마웠습니다. 이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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