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은 아들을 다 다른 방식으로 사랑한다. 어떤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통해 접근하려 하고, 어떤 아버지는 친구처럼 장난을 걸며, 어떤 아버지는 속되지만 현실적인 지혜를 전수해주려고 하고, 어떤 아버지는 교육을 위해 아이를 떠나보내고 또 어떤 아버지는 자기와 똑 닮은 모습으로 성장할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아버지에게는 명백하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행위들이 아이에게는 자상함, 무심함, 수치심, 폭력 등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버지들은 아들을 생산하고 욕망할 수 있지만 아들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없다. 그것이 바로 영화 속 주인공인 화이(여진구)를 비롯해 지상의 모든 아이들이 처한 불행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없지만 동시에 그들은 내 존재의 근원이므로 그를 부정하는 순간 그것은 주체의 자기 부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이에게는 극복하고 부정해야 할 아버지가 무려 다섯이나 된다. 그리고 그 아비들은 앞서 언급한 ‘사랑’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행사한다. 어린 시절 범죄집단에 유괴된 화이는 자신을 유괴한 다섯명의 사내를 아버지라 여기며 자란다. 호칭은 화이가 가진 친밀감과 공포감을 근거로 구별된다. ‘낮도깨비’라고 칭해지는 범죄집단의 우두머리 격인 석태(김윤석)만이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것은 ‘악’(惡)에 대한 어떤 거부감도 없는, 아니 오히려 ‘선’(善)을 보면 계급적 위화감을 느끼는 석태가 화이에게 자신과의 동질성을 획득하기를 강요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는 괴물 환상을 보는 화이에게 ‘괴물이 두렵다면 스스로 괴물이 돼라’고 가르친다. 화이의 태생적 배경과 성향에 대해 깊은 열등감과 분노를 품고 있는 석태는 화이를 자신의 진짜 아들로 만들기 위해 화이에게 생물학적, 정신적 ‘살부의식’을 치르게 만든다.
전설적인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 이후 10년 동안 절치부심한 장준환 감독의 신작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는 ‘과유불급’과 ‘소탐대실’을 동시에 떠오르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는 아버지들만큼이나 많은 설정이 있고 하나하나 다 매력적인 서사적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요소들이 너무 도드라져 조화롭지 못하고 액션은 과도하게 잔혹하다. 반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인 괴물의 정체를 납득시키는 데 특히 석태의 괴물성과 ‘낮도깨비’에 동참하게 된 다른 아빠들의 마음을 설명하는 데는 소홀하다. 그래서 왜 자신을 그렇게 잔혹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화이에게 ‘아직도 더 설명이 필요해? 더 간단하게 설명해줄까?’라며 윽박지르는 석태 앞에서 관객 역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알지 못해 주눅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