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박 메일이 쇄도하고 있다.” <목욕의 신> 연출을 맡은 이정섭 감독은 요즘 밀려드는 캐스팅 제안에 당황하고 있다. “원작의 팬층이 워낙 두텁다.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예전 <슬램덩크> 같은 분위기로 통하는 작품이니 다들 한목소리 하고 싶은 거다.” 인터넷엔 가상 캐스팅이 난무하고, 아이돌 팬들은 서로 ‘우리 오빠’를 캐스팅해달라고 목매는 분위기다. 20대 초반 배우들이 주축이 되는 시나리오다 보니, 또래 배우들의 관심도 꽤 높은 프로젝트다. “이상할 정도로 캐스팅이 순조롭다. (웃음)”
2011년 여름부터 연재된 하일권 작가의 <목욕의 신>은 웹툰계의 최고 화제작이었다. 취업난을 겪던 허세가 우연히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럭셔리 금자탕의 세신사로 취직해 동료 세신사와 경쟁하면서 겪는 해프닝이 주된 줄거리. 허무맹랑하고 과장된 설정이 바탕이지만, 허세와 금자탕의 젊은이들을 통해 지금 청년들이 품고 있는 꿈과 인생의 가치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88만원 세대에 대한 메시지가 분명히 있는 작품이다. 청춘을 위한 영화, 그들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예전 같은 청춘영화가 요즘은 없다. 그런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타이 여행 중에 원작을 접했다는 이정섭 감독은 1, 2화에 꽂혀서 바로 하일권 작가에게 만나자고 했다. “메이저 회사 6곳 정도에서 이미 제안을 받았다고 했는데 다들 비즈니스적인 접근을 했더라. 난 구체적으로 영화화 계획을 말했는데, 그게 하일권 작가에게 어필한 것 같다. 계약하고 나서 대기업에서 공동제작도 제안했는데 거절했다. 큰 회사 간섭 없이 온전하게 창의성을 가지고 만들어보고 싶었다.”
중요한 건 원작의 상상력을 어떻게 현실성을 가진 영화로 전환할 것인가였다. 지난 1년간의 시나리오 작업은 그 최적화를 위한 시간이었다. 캐릭터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리는 한편 취재를 통해 목욕의 역사와 문화를 보충했다. “강풀, 윤태호 작가가 스토리텔러로 완벽하다면, 하일권 작가는 조금 다른 부류다. <목욕의 신>은 상상력이 확 나간 작품이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를 보면 만화 원작과 결합된 특유의 코드가 인상적인데, <목욕의 신>도 이렇게 재밌게 한번 놀아볼 수 있겠다 싶었다.”
영화의 75%가 금자탕 세트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 역시 거대한 목욕탕의 재현이다. 금자탕의 위용에 따라 작품의 규모도 결정될 텐데 CG와 결합된 세트의 규모 때문에 프로젝트의 규모도 사극 한편에 해당하는 40억∼50억원 정도로 잡고 있다. 전세계 소문난 목욕탕, 사우나는 모두 섭렵하며 ‘팔자 좋게 프리 프로덕션 중’인 이정섭 감독은 금자탕 세트에 대한 그림을 이미 구체적으로 완성해둔 상태다. 원작보다 럭셔리한 대규모 스파의 형태라는 것이 그의 귀띔이다. 허세를 비롯한 선배 강해, 라이벌로 구성된 꽃미남 세신사들의 노출 수위도 초미의 관심사다. “전문 목욕 슈트를 제작 중이다. 너무 많은 노출보다 어느 정도 의상을 갖추고 있는 게 섹시함을 보여주는 데 더 효과적일 것 같다. (웃음)”
<목욕의 신>의 재미 중 하나는 역시 등장인물들의 때밀이 액션 대전인 ‘목욕투’를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다. 때의 비가 공중에서 내리는 만화적인 비주얼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럼에도 너무 비현실적이지는 않은 액션이 가미되어야 한다. 지금의 목욕투는 길거리 목욕투, 목욕투 클럽 등 온갖 액션 장면을 상상한 뒤 나온 결과물이다. “배우들 모두 액션스쿨 가야 한다. 액션 장면은 가이 리치의 <스내치>가 레퍼런스다. 현란한 편집, 박진감 넘치는 액션 신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때 효과 같은 건 미드 <스파르타쿠스>에서 보여준 영상적인 피의 효과와 비슷한 분위기를 생각하고 있다.”
<역도산> 제작팀을 거쳐 <로맨틱 아일랜드>를 연출한 이정섭 감독은 <목욕의 신>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보여줄 작품이라고 말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가 너무 리얼함의 강박에 빠져 있었고 거기서 오는 피로감이 있었다. <목욕의 신>이 주는 만화적 상상력과 쾌감이 새로운 분위기를 제시할 거라고 본다.” 한창 캐스팅 중인 <목욕의 신>은 내년 여름 개봉이 목표다.
“영화를 위한 만화가 아닌 만화 자체를 만든다”
<목욕의 신> 하일권 작가
하일권 작가는 강풀, 윤태호 작가에 이은 또 하나의 브랜드다. 1년에 평균 두번, 30회 남짓의 간결한 분량으로 내놓는 그의 작품은 청춘과 결합한 판타지라는 독특한 설정과 힘있는 이야기로 영화인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데뷔작 <3단합체 김창남>을 비롯해 <두근두근두근거려> <안나라수마나라> <삼봉이발소> <목욕의 신> 등 하일권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이 영화, 연극, 드라마 제작을 위해 판권 계약됐다.
-‘제2의 강풀’로 불린다. 내놓는 작품마다 모두 판권 계약이 되는 비결은 뭐라고 보나. =영화 한편 정도의 분량, 딱 그 정도의 이야기 구조를 좋아한다. 기승전결이 보이는 구조랄까. 딱 봤을 때 영화로 견적이 나온다고들 하시더라.
-<목욕의 신>은 영화화 경쟁이 치열한 작품이었다. =1화 올라갔을 때 연락 온 분도 있었다. 찜했으니 같이 하자고. 그분 그 뒤로 연락을 안 하셨다. (웃음)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제의도 많아서 고민을 했다. 중요하게 본 건 열의였다. 내 작품을 얼마나 이해하고 좋아하는지, 어떻게 만들지 이런 것들이 궁금했다. 이정섭 감독과 계약한 건 가장 구체적이어서였다. 언제까지 개발해서 착수하고 영화화하겠다는 계획이 정확했고 곧 작품이 만들어지겠다 싶었다.
-영화화하기에 무리인 부분도 적지 않다. 원작자로서는 어떻게 보나. =여러 차례 미팅하면서 정말 이해가 안되더라. 금자탕도 실제 지을 수 없을 정도의 규모인 데다 때가 막 튀는 설정 자체가 굉장히 만화적인데, 이걸 어떻게 영상으로 만들겠다는 건가 싶더라. 연재할 때 2차 저작물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었던 작품이다. 아무래도 젊은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상황들에 마음이 가지 않았을까 싶었다.
-각색 작업에 대해 발언권을 어느 정도 가지나. =제작사에서는 시나리오에 참여해도 좋겠다고도 하시더라. 그런데 시나리오 수정본을 검토하고, 내 느낌을 말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작가 개개인의 스타일이 아닐까 싶은데 나는 완전히 맡기는 편이다. 원작자이지만 내가 영화쪽 전문가는 아니고, 원작이랑 똑같이 갈 거면 원작자가 만들어야겠지. 난 원작의 소재나 주제 빼고 다 버리고 가더라도 무조건 영화쪽에 맞춰줘야 한다는 주의다.
-처음 판권이 팔린 작품은 <삼봉이발소>였다. 연극으로 만들어져서 벌써 6차 공연을 하고 있는 성공적 사례다. =2006년이었는데 연극으로 하기 전에 영화 판권 계약을 했었다. 그땐 신인이었고 아무것도 모를 때라 계약을 했다는 게 너무 기뻤다. 영화화가 되건 안되건 내 작품을 누군가가 알아줬다는 것 자체가 좋더라. 소규모 신생 제작사였는데 결국 제작 여건 때문에 프로젝트가 중단됐다.
-지금과 비교하면, 원작자에 대한 조건도 달랐을 것 같다. =<삼봉이발소> 연재할 때 내 고료가 50만원도 안될 때였다. 판권료는 제안하는 대로 받았는데 그것도 고마웠다. 지금은 웹툰 작가들의 발언권이 좀 세졌다. 판권 평균 가격도 올라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인이더라도 더 확실하게 주장을 했더라면 수용됐을 텐데, 내가 워낙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나도 구체적인 조건을 터득하게 되더라. 그렇다고 딱히 요구사항이 있는 건 아닌데, 워낙 계약만 하고 안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꼭 만들어 달라는 조건을 내건다.
-<3단합체 김창남>은 영국 페브러리 필름스에 판권이 팔린 경우다. 국내 제작사와 계약 조건이 좀 달랐나. =한국에서 제작하던 분이 영국에서 만든 영화사라 실질적으로 차이는 없다. 그보다 서구권에도 원작의 정서가 통할까 싶었는데, 동서양 할 것 없이 공감할 만한 소재라고 하더라. 큰 규모의 SF영화로 제작될 것 같지는 않고, 감정 전달에 두는 작품이 될 것 같다. 계약 기간을 길게 잡았고, 아직은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아예 영화화할 작품을 만들 생각도 들었겠다. =<삼봉이발소> 계약하고 나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영화화를 따지다보니 기획하고 창작할 때 발목을 잡더라. 스스로 상상력을 차단해버리는 거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배제하고 간다. 제의가 오면 좋고 안 와도 작품 자체로 온전하다는 생각이다. 웹툰은 웹툰 자체로 완성된 콘텐츠다. 난 만화가고 영화를 위한 만화가 아니라 만화 자체를 만드는 사람이다. 2차 판권은 그 뒤의 문제라고 본다.
-웹툰과 영화의 결합, 어떻게 보나. =웹툰이 영화화되기 위한 하나의 단계, 영화의 스토리보드라고도 하는데 실상 그렇게까지 잘된 경우가 없다. 웹툰이 오히려 영화화에 아주 안 맞는 콘텐츠가 아닌가라는 의문도 있는데, 생각해볼 부분이다. 그래도 나는 원작자로서나 독자로서나 계속 시도됐으면 좋겠다. 시행착오를 통해서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재밌게 본 작품을 실사로 다시 본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