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섬주섬. 지갑을 한참 뒤적이던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서로 전혀 다른 색깔이 묻어나는 명함 두장을 더 내밀었다. 연상호 감독이 이끌고 있는 ‘다다쇼 프로덕션’, 다른 한장은 장형윤 감독의 보금자리인 ‘지금이 아니면 안돼 프로덕션’의 것이었다.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그의 표정은 그러나 피로보다는 적량의 아드레날린을 분출 중이었다. 연상호 감독의 <사이비>가 곧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고, 장형윤 감독의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도 내년 1월이면 인고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사이비>가 마을에 생긴 교회에 아내와 딸을 빼앗긴 아버지의 싸움이 골자인 사회드라마라면,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얼룩소로 변한 청년과 소녀의 모습을 한 인공위성의 사랑을 다룬 판타지멜로다. 이렇게 각기 다른 개성으로 완전무장한 독립장편애니메이션을 동시에 2편이나 프로듀싱하고 여기에 내년 40주년을 앞두고 발돋움판 마련에 한창인 서울독립영화제 준비까지, 몸이 세개라도 모자랄 그를 만나 독립영화 멀티 플레이어로 살아가는 법에 대해 들었다.
-2011년 11월 말, 한창 서울독립영화제가 힘들었을 때 만나고 거의 2년 만이다. =그러게. 영화제는 11월 말인데 9월에 전화 와서 당황했다. 아무런 타이밍도 아닌데 왜 나를 인터뷰하려는 건가.
-오늘은 <사이비>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의 독립애니메이션 프로듀서 조영각을 만나러 왔다. =감독들이 왜 저 양반이 내 영화로 인터뷰를 하고 있냐고 질투할 것 같은데. (웃음)
-<돼지의 왕> 이후 3편째 애니메이션만 하고 있는데, 원래 애니메이션에 뜻(?)이 있었나. =운때가 맞았을 뿐이다. 연상호 감독은 <돼지의 왕>을 제작하고 싶은 열망은 있는데 잘 안돼서 세상에 불만이 많았을 때 만나게 됐고, 장형윤 감독의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도 마지막에 도움이 필요했던 상황이었고.
-<돼지의 왕> 개봉 때부터 입소문을 내고 다녔던 <사이비>는 이동하 PD(<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시> 외)의 권유로 NEW에 시나리오를 넣어봤다고. =연상호 감독이 투자를 받아왔더라. 프리 프로덕션을 크릭앤리버라는 곳에서 투자받아 진행 중이었는데, 프로덕션 비용은 제작지원이 안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던 모양이다. 나는 워낙 정체성이 이래서 상업영화 회사와의 미팅에는 잘 나서지 않는 편이다.
-연상호 감독이 제작자 마인드가 투철해서 짐을 던 면도 있나. =독립애니메이션 할 사람들은 연상호 감독의 모델을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돼지의 왕>을 1억5천만원으로 만든 건 세계적으로 봐도 이례적인 경우다. <사이비>도 3억8800만원으로 이 정도의 퀄리티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면 대단하다. 제작비 대비 성능이나 작화 퀄리티가 <돼지의 왕>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아졌다. 오히려 NEW에서 돈 많이 받은 거 아니냐고 할까봐 걱정이다.
-어쩐지 위원장님이 연상호 감독한테 채근당할 때가 더 많을 것 같다. =연상호 감독은 PD나 스탭, 심지어 투자자도 그 속도를 못 따라간다. <사이비>를 칸영화제에 내겠다고 해서 내가 3월에 내도 된다고 하니까 ‘마감이 1월이던데? 그때까지 끝낼게’라며 막 작업을 하는 거다. 그리고 사무실 가면 다음 프로젝트 이미지 컷들을 또 막 보여준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물려 들어가야 스튜디오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나는 이것부터 끝내고 이야기하자 그러지.
극과 극이지만 둘 다 변태 감독
-장형윤 감독과는 작업 패턴이 좀 달랐을 것 같은데. =비교체험 극과 극이다. 형윤이는 딱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의 얼룩소다. 시나리오 땐 몰랐는데 컷을 붙여놓고 보니까 얘가 계속 잠만 자고 있는 거다. 형윤이도 보더니 ‘정말 그러네?’라며 몇컷은 다른 자세나 표정으로 바꾼 적이 있다. 아무튼 계속 새로운 캐릭터를 고민하면서 그 와중에 수영도 다니고, 미팅도 하며 인생을 즐기는 스타일이다. 지금 그럴 정신이 있냐고 다그치면 ‘형, 나 애니메이션 잘하려고 하는 거야’라고 그러고. 내가 둘 다 변태라고 그런다. 한쪽은 에너지가 너무 넘쳐서 변태고 다른 한쪽은 너무 여유만만이라 변태.
-두 감독을 대할 때마다 모드 전환이 극심했겠다. =결국 양쪽에 다 짜증을 내게 된다. (웃음)
-<사이비>를 하던 중에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도 맡게 됐다. 부인이 조감독으로 있는 프로젝트라 망설였을 법도 한데. =망설였다.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왜 완성이 안되고 있을까, 옆에서 궁금해하며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5년 넘게 같이 하고 있었던 심현우 PD가 갑자기 그만두면서 누군가는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맡게 됐다.
-합류했을 때도 한창 시나리오 수정 중이었다고. =제작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생각이 자꾸 변하는 거다.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선 완성을 해서 관객과 만나야 영화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랑 같이 하게 된 뒤에도 형윤이가 몰래 계속 고치는 거다. 애니메이션은 한 신 갖고 두달, 세달 다시 그릴 수 있으니까. 한번은 실컷 시나리오를 고쳤는데 조감독이 뒤집은 적도 있다. 네가 그려라, 우린 못 그린다. 그러면 순순히 또 접는다. 나는 복장이 터지지. 요즘은 협박까지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다음 영화 못 만든다고. (웃음)
-상대에 따라서 잔소리가 많은 편인가. =얼마 전에 술 먹는데 형윤이가 집행위원장이랑 감독 사이로 만났을 때는 감독으로 존중받았던 것 같은데 PD로 만나니 만날 구박만 한다고 그러긴 하더라.
-시나리오 모니터링할 때 엽기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던데. =한 에피소드에만 계속 매달려 있을 수 없으니까 속도를 좀 내자는 의미에서 막 던졌다. 여기서 노래 부르면 어떨까? 자동차로 이동하면 어떨까? 애니메이션이라고 ‘야, 이거 그리는 데 힘드냐?’ 이러면서. (웃음) 하나도 반영은 안됐다.
-<사이비>에서는 제안한 의견이 더러 반영됐다고. 오프닝 신의 포클레인이라든지. =우긴 거다. 수몰지구인데 감독은 저수지나 강은 안 보여주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래도 공사현장인데 포클레인 같은 게 나와 줘야 하지 않냐고 했다, 다음날 갔더니 그려져 있더라. 지난 정부나 이번 정부에서 포클레인이 상징하는 바가 있잖나. 당대성이 느껴졌으면 하는 장면들이 있었다.
-당대성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두 감독의 결이 완전히 다르잖나. =장형윤 감독 작품에도 당대성은 있다. 얼룩소가 왜 얼룩소가 됐겠나. 하고 싶은 음악도 잘 안되고 직장도 못 구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잃어버린 젊은 세대의 문제가 녹아 있는 거다. 그걸 얼룩소로 표현하는 게 장형윤 감독의 색깔이다. 그에 비해 연상호 감독은 좀더 뜨거운 문제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두 감독 다 위원장님의 섭외 능력에는 만족하더라.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 무려 유아인, 정유미를 캐스팅했다. =정유미씨가 된 것만도 좋았는데 정유미씨가 유아인씨까지 소개시켜줬다. 그래도 목소리가 맞을지는 녹음을 해봐야 아는 건데, 해보니 두 사람의 앙상블이 무척 좋더라. 특히 정유미씨는 신마다 연기를 다 준비해왔더라. 놀랐다.
-<사이비>에는 권해효씨도 나오던데, 캐스팅 노하우가 있나. =돈도 많이 못 드리는데 1인다역까지 부탁해야 하니까 최대한 정중히 여쭤보는 게 다다. 단서조항도 붙인다. ‘다른 역할이 추가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젊은 역할로 캐스팅했는데 녹음실에 가보니 할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거다. 어떻게 된 거냐니까 연상호 감독은 “이분은 이게 잘 맞는데?”라고 태연하게 대꾸하고. (웃음)
-그런 배우들을 캐스팅해놓고 나면 한숨 놓을 수 있겠다. =더 긴장된다. 홍보 위해서 성우 대신 배우 썼다는 말 들으면 안되잖나. 그리고 극영화를 했던 입장에서는 스튜디오 녹음이 유일한 현장 같은 느낌이라 제일 긴장되는 순간이다.
-연상호 감독이 <돼지의 왕> 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번에는 엑스트라로만 썼다더라. =상호가 날 안 쓰려고 노력을 많이 하더라.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서도 카페 사장 역으로 녹음은 했는데 안 쓸지도 모르겠다. 형윤이도 냉정하게 못한다고 그러더라.
-두 감독에게 PD로서 아쉬움을 산 부분은 없나. =두 감독은 한 프로덕션을 짊어지고 있는 감독 겸 대표이고, 나는 프리랜서 PD로 결합한 사람이기 때문에 작품에 대해 느끼는 온도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감독 입장에서는 더 많은 것을 바랄 수 있지. 형윤이한테도 미안한 게 영수증 계산을 형윤이가 하고 있다. 제작 기한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서 사람을 못 구한 거다. 그래서 최종 크레딧에 ‘회계 장형윤’으로 올릴까도 진지하게 고려 중이다.
-연상호 감독에 따르면 감독한테 모두 맡겨두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도 하던데, 위원장님이 생각하는 애니메이션 PD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인가. =연상호나 장형윤 두 감독 다 나 없어도 충분히 영화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감독이 자기 작품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 이상한 점은 이야기하는 것,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이 계속 유지될 수 있게 만드는 것 정도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배급 시스템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두 영화의 배급 계획은 어떻게 되나. =오히려 <사이비>를 콤팩트하게 풀고,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를 와이드하게 풀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이비>는 와이드로 가려면 제작비 이상의 비용을 들여야 하는데 NEW에서 그럴 것 같진 않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마법사도 나오고 인공위성도 나오는 판타지멜로인 데다 총제작비도 여기저기서 찔끔찔끔 받아서 쓴 게 많아 그 2배 정도 되기 때문에 작게 가기 애매한 영화가 됐고.
-요즘 한창 서울독립영화제 예심도 보고 있겠다. 역대 최다인 810편을 받았는데 상영작 선정의 가장 고민스러운 점이라면. =좋은 영화는 많은데 새로운 영화를 발굴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다른 영화제나 상영회를 통해 이미 소개된 작품들이 많다. 좋은 영화들을 가져오되 그 안에 새로운 영화들을 어떻게 안배하느냐가 문제다.
-올해 응모작들 사이에서 어떤 기류가 느껴지는지. =2년 전과 비슷한 대답을 해야 할 것 같다. 독립영화가 중요한 게 당대성인데, 현실 비판이나 사회 고발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진 독립 프로젝트들은 영화로 완성되기보다 인터넷이나 다른 루트를 통해 많이 소화되는 것 같다. 반면 영화로 완성된 작품들은 사회 문제를 자신의 이야기와 결부한 개인적인 영화들이 많다. 이야기한다고 해서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내면화 과정에 집중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총상금을 전년 대비 50% 가까이 증액했다. =예전부터 올리고 싶었다. 물가가 인상되면 상금도 올라야지. 다행히 올해 영화진흥위원회, 서울시 지원금이 다 회복돼서 가능했다. 상금이 제일 적었던 2010년, 2011년에 상 받은 친구들한테 제일 미안하다.
-신설된 부문들도 눈에 띈다. =독립영화계도 고령화돼서 신진들이 본선에 올라오기 매우 어려워진 터라 지난해에 신진들만 따로 모아 한번 더 평가하는 ‘새로운 선택’ 부문을 신설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올해는 장편 하나, 단편 하나, 두편으로 늘릴 거다. 또 아까 오전에는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에서 전화가 와서 촬영상을 주고 싶다고 해서 촬영상도 신설될 것 같다. 그러면 열혈스탭상을 좀더 마이너한 영역의 스탭들에게 줄 수 있을 거다.
-상영관은 잡았나. =역대 최대 규모가 될 것 같다. 압구정 3개관, 인디스페이스 1개관, 총 4개관에서 연다. 내년이 40주년이라 올해 규모를 늘려놓고 차근차근 준비해갈 계획이다.
-올해의 슬로건은 뭔가. =‘Why Not?’이다. 독립영화는 주로 질문을 던지는 쪽이잖나. 올해는 반대로 대답을 던져보려 한다. 독립영화 왜 하세요? 와이 낫? 독립영화가 재밌어요? 와이 낫? 우리 독립영화 하고 있는 것 괜찮은가? 왜 아니겠어? 그게 우리 스스로에 대한 대답도 될 수 있을 거다. 이거 내가 박박 우겨서 정한 거라 안 뜨면 욕 왕창 먹는다. (웃음)
-독립영화인터뷰전문지 <NOW> 창간호도 나왔다. =영화 모아서 트는 것보다 중요한 건 담론을 생산해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거다. 독립영화 관심있는 사람들이 글도 쓰고 감독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근데 반응이 좋아서 자극을 받았는지 애들이 다 그 일만 하고 있어서 큰일이다.
-다큐멘터리 <타이거즈의 눈물>은 어떻게 된 건가. =감독이 두손 들고 도망가서 답보 상태에 있는 프로젝트다. 나도 빠진 상태이고. 그러고 보니 내가 손댄 영화 중에 유일하게 엎어진 영화네.
-요즘 기아 타이거즈도…. =덕분에 야구를 안 봐도 돼서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있긴 하지만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야구 얘기는 하지 말자. 요즘 기아 팬들끼리도 야구 얘기는 안 한다. (웃음)